詩書畵 雲谷 姜張遠

 

 
작성일 : 05-08-15 11:09
남명 조식 선생
 글쓴이 : 운곡
조회 : 3,509  
행동하는 중심 - 성리 학자, 남명 조식선생>


글/ 박민철(시인)

옛날에 낙동강을 경계로 강좌에 안동을 중심으로 퇴계 이황과 강우에 진주를 중심으로 남명선생 조식이라는 분이 있었다. 실학자 성호 이익은 퇴계를 중심으로 하는 학파는 仁을 숭상하고, 남명을 중심으로 하는 학파는 義를 주로 하는 학문을 열었다. 그러나 퇴계이황은 지폐에도 나올 정도로 알려져 유명해진 반면 남명선생은 그렇지 않았다.

실제로 남명의 문헌이 기록에 많이 남아있지 않아서 그렇다는 말도 있지만, 역사는 지배자의 역사고 사실의 기록 또한 사실이 아닌 '기술'이라는게 역사를 공부한 보통사람의 인식이다. 결국 바라보는 사람의 생각과 관점이 평점의 시대를 반영할 수 밖에 없는데 이번달에는 유명한 성리학자 낭명 조식선생에 대해 모든 자료를 참고로 시인 박민철이 파헤쳐 간다.

남명조식(1501∼1572)선생은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 삼가에서 탄생하였다고 한다,그는 조선중기의 성리학자로 실천유학을 많이 역설하였다고 하는데, 평생 산림(山林)에 은거하여 성리학을 연구하여 경(敬)과 의(義)로 집약되는 독특한 학문을 이룩하여 사림(士林)의 종사(宗師)로 추앙받은 분이라 할수 있겠다.

남명선생은 성리학 뿐 만 아니라 천문, 지리, 의방, 수학, 궁마, 진법 등과 노장 및 불교까지 폭 넓게 섭렵하여 남자가 갖추어야 할 모든 지식과 재능을 익히고, 젊어서부터 정신력과 담력을 많이 길렀다고 하니, 그가 정립한 철학은 경의철학(敬義哲學)이라고 불리는 데, 경(敬)은 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이요(內明者敬), 의(義)는 밖으로 행동을 결단하는 것(外斷者義)이라고 한다. 이렇듯, 남명선생은 공허한 이론적 탐구보다는 실천과 실용을 중시하였고, 이는 뒷날 실학의 선구자적인 위치를 굳건히 차지하게 되다

일단 박민철이 그의 유적을 찾아 산청에 도착하여 큰 교량 하나를 지나니 관광안내 표지판에 남명선생유적지라는 글귀가 나왔다. 이윽고 그 유명한 산천재가 보였는데 시인 박민철이 이번달에 찾아간 남명선생의 첫 번째 山天齊는 큰 길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어 일단 유적지를 찾는데에는 별시리 어려움이 없었다. 남쪽으로는 덕천강이 흐르고 북쪽으로는 아름다운 지리산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남명의 自然觀을 엿볼 수 있는 단아(端雅)한 모습의 산천재는 세월의 풍파에 낡고 헐어 여러차례 중수(重修)되어 왔음에도 아직까지 과장되지 않는 듯 하였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단정한 건물 기둥에는 남명의 시구가 가지런히 적혀 있었다. 아마 어제 비가 온 영향일까 날씨는쾌청하여 금상첨화(錦上添花)로 산들 바람까지 불고 있었으니 마치 사랑하는 여인이 나의 귓볼을 간지럽히는 것 같다. 아래는 아름다운 남명의 시 한구절을 읊어 본다.

瑤草春山綠滿圍 아름다운 풀로 봄 산에 푸르름 가득한데
爲憐溪玉坐來遲 옥같은 시냇물 사랑스러워 늦도록 앉아 있노라
生世不能無世累 세상을 살아 가노라면 세상 얽매임 없을 수 없기에
水雲還付水雲歸 물과 구름은 다시 물과 구름으로 돌려 보낸다


그러나'산천재'는 처음의 생각보다 초라했는데. 그러나 이 곳은 남명선생이 만년에 후학을 곧은 심지로 크게 양선한 곳이다. 일명 남명 조식선생은 실천을 중요시하는 행동철학을 주장했다고 이미 말한바 있는데, 이 산천재에서 가르친 인재들 속에서 그는 임진왜란 때 일어난 의병장(곽재우, 정인홍, 김면 등)등이 나왔다고 하는 사실은 그의 언어 철학이 아닌 행동철학을 증명하는 실례로 보인다. 남명 조식선생은 오늘날 치, 학술, 절의 등의 분야에서 수많은 영재를 길러내어 우리나라 교육사에 있어 가장 성공한 교육자로 평가받고 있다.

남명선생의 교육철학은 개인의 자질에 따라 가르치면서 넓게 지식을 섭취하되 그것을 자기 것으로 소화하는 것을 중히 여겼으며, 아는 것을 결국 실천에 옮기도록 하는데 그 목적을 두었다 한다. 학교교육이 붕괴되어 가는 작금의 우리나라교육실정을 개선하기 위해서 남명선생의 가르침에 크게 귀 기울여 보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따라서 남명의 미의식의 지향은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세상 얽매임 없을 수 없다'는 발언에서 잘 드러난다. 남명은 '自然의 人間化'라는 방향을 추구하였다. 얼핏 현실을 중시하는 外王의 사상적 기저와 현실로부터 절연하려는 은일의 처세라는 남명의 모순된 듯한 입장은 그의 미의식이 일관되게 '自然의 人間化'라는 원칙 위에 서 있었음을 이해한다면 비로소 양립될 수 있었던 것임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남명의 시 세계에 드러난 미의식을 규명하는 일은 그의 사상적 지향과 현실적인 처세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과 괴리를 이해하는 하나의 중요한 연결 고리라고 할 수 있다. 자연 속에 파묻혀 있으면서도 어려운 현실을 도외시 하지 않으려 했던 남명의 삶은 세상을 등지고 도닦기에 바쁜 사람보다 더 바람직한 삶이였다고 생각을 두게 된다. 산천재의 기둥에는 남명고운 시가 이렇게 씌여져 있었다

춘산저처무방초 (春山底處無芳草)
지애천왕근제거 (只愛天王近帝居)
백수귀래하물식 (白手歸來何物食)
은하십리끽유여 (銀河十里喫有餘)

'봄산 어느 곳엔들 향기로운 풀 없으리오마는
다만 천왕봉이 옥황상제와 가까이 있는 것을 사랑해서라네
빈손으로 돌아와 무얼 먹을 건가
은하수 같은 맑은 물 십리에 흐르니 먹고도 남겠네'

남명 선생이 산천재에 머물게 된 까닭은 당시 기묘사화로 숙부인 언경가(彦卿家)가 멸문의 화를 입고, 자신이 지향하는 外王의 원칙이 현실 정치에서 실현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그는
벼슬을 단념하고 1561년 오늘날의 리산 기슭 진주덕천동(德山洞:지금의 산청군 시천면)으로 이거하여 이 곳 산천재(山天齋)를 지어 죽을 때까지 머물며 강학(講學)에 힘썼다고 한다

다시한번 산천재의 소재를 정확히 말해 가면은 선천재의 소재지는 경남 산청군 시천면 사리 (慶南 山淸郡 矢川面 絲里)이며 건립연대(建立年代)는 1561 년(약 420여년전)이다,산천재(山天齋)의 유래(由來)는 남명 조식선생(南冥 曺植先生)이 만년(晩年 61세에서 72세까지 11년간)에 학문(學問)과 인격(人格), 확립(確立)된 정신(精神)과 경륜(經綸)을 고스란히 후학(後學)들에게 전해 인간교육수양(人間敎育修養)의 산 도장(道場)이다.

산천재(山天齋)란 이름은 주역대축괘(周易大畜卦)에서 따온 것이다. 대축괘(大畜卦)는 상간하건(上艮下乾)으로 이루어졌는데, 간( 艮)은 산(山)이요, 건(乾)은 천(天)이니 산천(山天)은 바로 간건(艮乾)의 형명(形名)인것이다. (교육후생 敎育後生) (보은천지 報恩天地) 이제까지 배운 지식과 인격(人格)을 실제로 행하며, 더욱 그 덕(德)을 축적 일생(一生)을 하여 마무리 지었던 것이다.

과연 남명(南冥)의 만년(晩年)은 그 재호(齋號)대로 여기서 대성(大成)하고 완인(完人)이 되었으니 산천재(山天齋)는 우리나라 유학교육(儒學敎育)이 성공(成功)한 하나의 본보기가 되었다. 남명(南冥) 일생(一生) 최후최고(最後最高)의 빛을 발(發)한 때가 바로 이 산천재(山天齋) 시절이며 그의 회광반조(回光返照)는 길게 조선(朝鮮) 선비들에게 하나의 커다란 불기둥이 되어 앞길을 밝혀주는 작용을 했다. 그러므로 산천재(山天齋)는 바로 조선 선비들의 불식(不熄)하는 활화산(活火山)이었던 것이다.

산천재의 사적(史蹟)으로서의 큰 의의(意義)는 산천재(山天齋)가 비록 큰 서원(書院)이나 향교(鄕校), 국학(國學)에 비할 바는 못되나, 조선(朝鮮)이 가장 어려웠던 선조(宣祖)때의 국사(國事)와 국난(國難)을 타개(打開)한 인물들이 길러졌으니 인재교육(人材敎育)의 전형(典型)이다.

특히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당해서 일어난 의병장(義兵將)들이 여기서 가르친 인재(人材)속에서 많이 나왔으므로 교훈(敎訓)을 남겨 준다. 이 산천재(山天齋)에서 남명이 학생(學生)들을 가르친 교육철학(敎育哲學)의 요체(要諦)는 경(敬)과 의(義)다. 이는 조선유학교육(朝鮮儒學敎育) 중에서 좀 빈약했던 행동(行動)면을 중시한 것으로 산천재(山天齋)는 바로 행동철학(行動哲學)의 발상지(發祥地)이였던것이다. 잠시 다른 길을 가기전 그 유명한 남명의 시 조 한 구절을 다시 읊어보면,

두류산(頭流山) 양단수(兩端水)를 네 듣고 이제 보니,
도화(桃花) 뜬 맑은 물에 산영(山影)조차 잠겼애라.
아희야, 무릉(武陵) 이 어디메뇨, 나난 옌가 하노라.

시인 박민철은 산천재를 나와 남명 선생의 묘소로 발길을 옮겼다. 남명 선생의 묘소는 산천재 바로 옆의 산에 있었다. 다행히 묘소는 상당히 잘 정비되어 있었는데. 남명선생의 묘소에는 남명선생 부인의 묘도 같이 있었다. 일단 풍수지리를 잘 모르는 본 작가도 전망히 확트이고 햇볕이 잘 드는 묘소가 남명선생이 영면하기에는 괜찮은 장소로 보였다.

사실 남명선생에 대한 연구는 매우 왕성한 활력을 불어넣고 있는데 현재에도 진주 국립대학인 경상대학교 '남명학 연구소'와 경남 산청의 '남명 기념관'에서 남명선생에 대한 많은 행사와 축제 활동을 자주 보이고 있다. 시인 박민철은 일단 묘소를 내려와 덕천서원을 향했는데 가는 길에 문익점 시배지라는 간판이 보이길래 학창시절 국사시간에 배운 문익점에 대해서 특별히 조사 공부할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얼마안가 덕천서원에 도착했고. 그곳의 관광안내표지판은 잘 정리 되어있어서 쉽게 찾아갈 수 있었다.덕천서원은 남명선생이 별세한 이 후 남명선생의 제자들에 의해 본래 "덕산서원(德山書院)"이란 이름으로 창건되었다고 하는데,그 후 불행하게도 임진왜란 때 불에 타 버렸으나 10년 만에 재건되었다고 한다. 그 후 나라에서 "덕천서원(德川書院)"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여 사액서원이 되면서 덕천서원이 되었다고 한다

덕천서원에서는 몇몇 사람들이 서원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참 평화로웠다. 우리는 서원의 구석구석을 살펴보고 사진도 몇 장 찍었다. 박민철의 조부도 실제 서원을 운영하였다고 부친 생전에 이갸기를 전해 들은바 있었으나 조상의 흔적은 시대의 변천과 함께 옛 건물이 사라져 눈으로 직접 보지는 못했었는데 이번에 서원안의 궁금한점을 구석구석을 들여다 보게 된것이 작가에게는 정말 뜻 깊고 행운처럼 느껴졌다.

다시 돌아가서, 문헌의 남명선생은 여러차례에 걸친 조정의 부름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정국이 벼슬하여 뜻을 펼 수 있는 상황이 아님을 알고 일체의 벼슬을 마다하였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선비정신에 바탕한 산림처사(山林處士)로서 민본주의 정치사상에 입각하여 잘못된 국정을 과감히 비판하고 진실 명쾌한 대책을 제시하여 사림의 언로(言路)를 열고, 산림에 묻혀 학문을 수양하는 선비가 과거를 보아 벼슬에 나아가는 것보다 존경받는 풍토를 조성하였다고 한다. 만약 남명선생이 권력에 욕심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그는 높은 벼슬을 하며 안락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람이 바르게 산다는 것이 일견 쉬워 보이지만, 실제로 그것을 실천하기란 너무나도 어려운 것이다. 원래 인간은 욕망으로 가득 차 있고, 온갖 유혹이 주위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인데. 바른 삶을 위해 높은 벼슬을 마다한 남명 선생의 행적은 오늘날에도 심히 존경받아 마땅할 것이다.

남명의 자료를 찾아 문헌과 인터넷 이곳저곳을 찾으니 남명의 대쪽같은 선비정신이 더욱 돋 보였다. 무능한 왕권을 대놓고 비판한 남명(南冥)의 기개(氣槪)가 보였다. 오늘날 많은 문인들과 학자들이 왜 이 대쪽의 정신이 없을까, 오랬만에 옛 성현의 취재를 통해 크고 작은 깨우침들이 작가에게 다가온다. 선생의 작품 중 제덕산계정(題德山溪亭) 이란 좋은 글이 있다.한번 들어 새겨보라, 진정 그대에게 무엇을 말 하는지를 ...


제덕산계정(題德山溪亭)

請看千石鍾 非大 구 無聲
爭似頭流山 天鳴猶不鳴

여보게 천석들이 종을 보게나, 큰 힘 주어 두들지 않으면 참 소리 듣지 못하오.
정녕 두류산을 닮으려나,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 수 있을까?.

이 시는 남명 자신이 닮고자했던 지조 있는 이상적인 선비의 모습을 지리산을 천석종(千石鍾)이라고 부르고 있다. 워낙 큰 종이기 때문에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가 없다는 것이다. 하찮은 부귀영달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정말 벼슬할만한 때가 아니라고 판단되면 아무리 불러도 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명이 가르쳐준 세인들의 교훈에 함부로 준동하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도 담겨 있다.

남명선생은 실제로 1501(연산군 7년) 경상도 삼가현 토동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그 곳에서 보내다가, 7세 때부터 부친의 임지로 따라다녔는데, 그 시절에 정치의 득실과 백성들의 고충을 직접 눈여겨보게 되었다. 19세 때 산 속에 있는 절에서 독서를 하다가 조광조(趙光祖) 등의 죽음을 들었고, 또 숙부 언경도 연루되어 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고는, 어진 사람들이 간신 배에게 몰려 경륜을 펴지 못하는 것을 못내 슬퍼하였다

그는 25세때 과거를 위하여 절간에서 공부하다가, 원나라 학자 허형(許衡)이 "벼슬에 나아가서는 이룬 일이 있고, 물러나 있으면서는 지조를 지켜야 한다. 벼슬에 나아가서도 이룬 일이 없고, 물러나 있으면서도 아무런 지조가 없다면, 뜻을 둔 것과 배운 것이 장차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말한 구절을 보고 크게 깨달았다.

30세 때부터 김해 신어산 아래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제자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37세 때 어머니를 설득하여,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하기 시작하였다. 38세 때 이언적(李彦迪) 등의 천거로 헌릉(獻陵) 참봉(參奉)에 제수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45세 때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평소에 친분이 두터웠던 이림(李霖), 곽순(郭珣), 성우(成遇) 등 장래가 촉망되는 인재들이 화를 당하는 모습을 보고는 더욱 벼슬할 뜻을 버렸다.

48세 때 고향 삼가현 토동으로 돌아와 뇌룡정(雷龍亭), 계부당(鷄伏堂)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48세 때 전생서(典牲署) 주부(主簿), 51세 때 종부시(宗簿侍) 주부, 55세 때 상서원(尙瑞院) 판관(判官), 같은 해 단성현감(丹城縣監)에 제수 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선생의 상소 중 "대비(文定王后)는 진실로 생각이 깊지만 궁궐 속의 한 과부에 불과하고, 전하(殿下)는 돌아가신 임금의 어린 고아일 따름입니다."란 구절은 조야(朝野)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명종(明宗)은 남명의 글이 공손치 못하다 하여 처벌하려 했으나, 산림처사가 나라를 걱정하는 상소를 책잡아 처벌하는 것은 언로(言路)를 막는 부당한 조처라는 조정 신하들의 변호로 무사하게 되었다.

이 때 벌써 선생의 명망은 조야에 널리 알려져 있었고, 또 산림처사를 대표할 만한 위치에 있었으므로 임금이라 할지라도 사사로운 감정으로 처벌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온갖 부조리가 만연하던 당시의 정치 상황에서 선생의 과감한 직언은 산림처사의 비중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山中卽事

從前六十天曾假 此後雲山地借之
猶是窮塗還有路 却尋幽逕採薇歸

日暮山童荷鋤長 耕時不問種時忘
五更鶴 驚殘夢 始覺身兼蟻國王

이전의 육십 년은 일찍이 하늘이 빌려 준 게고,
앞으로 구름 낀 산에서 사는 건 땅이 빌려준 거라네.
막다른 길에도 또다시 길 있나니,
그윽한 오솔길을 찾아 고사리 캐어 돌아온다네.

해지는데 산골의 아이 호미를 메고 서서,
김맬 때도 묻지 않고 심은 때도 잊어버렸네.
오경의 학 울음소리에 새벽 꿈을 깨자,
비로소 몸이 개미나라 왕을 겸했다는 걸 알았다.


남명 선생은 61세때 지리산 아래 덕산(德山)으로 옮겨 산천재(山天齋)를 지어 제자들을 가르쳤다. 65세 되던 해 문정왕후가 죽고 곧 이어 윤원형이 관직에서 쫓겨나자, 을사사화 때 유배되었던 선비들이 다시 조정에 돌아오게 되었다. 그 이듬해 다시 임금으로부터 부름이 있자, 선생은 조정도 조금 맑아졌고 임금의 교지(敎旨)도 거듭 내리니 한 번 가서 군신의 도리를 밝히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서울로 가서 사정전(思政殿)에서 임금을 독대하였다.

명종이 나라 다스리는 도리를 묻자, 선생은 '정치 제도를 혁신할 것, 인재를 등용하려는 성의를 보일 것, 정치의 근본이 되는 임금 자신의 학문에 힘쓸 것 등'을 건의하였다. 조정에는 윤원형을 둘러싼 간신배들이 축출되고 어진 사람들이 복귀하여 명종이 비로소 직접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으므로, 선생은 평생토록 쌓은 학문과 경륜을 한 번 펴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그러나 명종을 만나 대화를 나눈 후, 그가 무슨 일을 할 만한 임금이 아님을 간파하고는 서울에 간 지 7일만에 곧바로 돌아왔다.

67세 되던 해 어린 나이로 새로 왕위에 오른 선조(宣祖)가 즉위 초에 두 차례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68세 때 역시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고, 역대 임금들이 나라 다스림에 실패한 사례를 지적하고서, '나라 다스림의 길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임금 자신이 학문과 인격을 닦는데 있습니다'라는 상소를 올려 어린 선조가 정치를 잘 해 낼 수 있는 바탕을 닦도록 간언 하였다.

72세 때 남명선생은 산천재에서 일생을 마쳤다. 임종시에 모시고 있던 제자 김우옹(金宇毋)이 "명정에 어떻게 쓸까요?"라고 물으니 선생은 "처사(處士)라고 쓰는 것이 좋겠다."라고 대답하였다. 선조는 곧 예관을 보내어 제사지내고, 대사간을 추증하였다. 이어 광해군 때에는 문정공(文貞公)이란 시호(諡號)가 내려지고, 그를 영의정에 추증 하였다.

남명선생(南冥先生)의 사상(思想)은 성리학(性理學)이 전래된 이후 그 이론적 탐구가 본격적으로 전개되어 꽃피울 무렵에 생존하였던 실천성리학의 대가였다고 한다. 즉 고려 말기 안향(安珦, 1243-1306) 등에 의하여 전래된 성리학이 조선 시대에 들어 그 학문적 깊이가 더하여 갔던 바,

김종직(金宗直, 1431-1492), 정여창(鄭汝昌, 1450-1504), 김굉필(金宏弼, 1454-1504), 조광조(趙光祖, 1482-1519) 등에 의하여 실천적 성향이 강하게 뿌리내리는 한편 서경덕(徐敬德, 1489-1546), 이언적(李彦迪, 1491-1553) 등에 의하여 실천적 측면과 아울러 이론적 측면도 중시되어, 16세기 중반기에 이황(李滉, 1501-1570), 이이(李珥, 1536-1584) 등에 의하여 성리학에 대한 이론적 탐구가 꽃을 피우게 되었던 것이다.

선생도 이러한 시대 분위기에 따라 성리학의 이론에 대하여 체계적이고도 깊이 있게 탐구한 바 있었다. 그러나 선생은 당대 현실을 직시하고 개혁하려는 의지는 가지지 않은 채 이론에만 몰두하는 학문의 폐해를 예견하면서, 오직 그 이론을 체득하여 몸소 실천하는 것만이 학자의 바른 태도라고 보기에 이른다. 요컨대 선생은 자칫 공허하게 될 소지가 다분한 이론적 탐구보다는 현실적인 문제를 직시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적 실천'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선생의 사상은 모두 이 '사회적 실천'에 귀결된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유학이 갖고있는 가장 본질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유학의 핵심 명제인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는 것도 '자신의 수양을 전제로 한 현실세계의 구제'라는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선생의 이 '사회적 실천'지향의 사상은 자신의 수양에 관련되는 것과 현실 세계의 구제에 관련되는 것으로 구분해서 볼 수있는 바, 주지하고 있는 '경(敬)'과 '의(義)'가 바로 그 두 축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경'과 '의'는 주역(周易)에 있는 "敬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義로써 밖을 반듯하게 한다(敬以直內 義以方外)."라고 한 것이 그 출전이다. 송대(宋代)의 성리학자들이 특히 이 가운데의 '경'을 적출 하여 심성 수양의 요체로 삼았던 것인데, 선생은 이 둘『敬義』를 다 뽑아서 '경'은 내적 수양과 관련시키고 '의'는 외적 실천과 관련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산천재의 벽과 창문 사이에 이 두 글자를 써 두고서, '우리 집에 경 과 의라는 이 두 글자가 있는 것은 마치 하늘에 일월이 있는 것과 같아서 영원토록 바뀌지 아니할 것이니, 성현의 온갖 말씀이 모두 결국은 경과 의라는 이 두 글자를 넘어서지 않는다"라고까지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경'은 마음을 수양하는 요체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므로, 선생은 마음을 수양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라면 꼭 유가(儒家)의 주장에만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장자(莊子)』에 나오는 '南冥'을 자신의 호로 삼고 또『장자』에 나오는 '시거이룡현 연묵이뢰성(尸居而龍見 淵默而雷聲:시동처럼 가만히 있다가 용처럼 대단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깊은 연못처럼 고요히 침잠해 있다가 우뢰같은 소리를 낸다)'라는 말을 따다가 '뇌룡정(雷龍亭)'으로 강학(講學)하는 장소 이름을 삼으면서까지,

양적인 면에서 엄청나게 크면서 질적인 면에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림이 없는 마음을 가지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경'을 통하여 항상 마음을 깨어있게 하면서 한편으로는 크고 흔들림이 없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기에 선생을 일컬어 '천 길 벼랑처럼 우뚝한'기상을 지녔다고 하는 것이다.

익힌 학문을 사회적 실천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내적 수양이 필수적으로 요구되기 '경'을 내적 수양의 방법으로 중시하는 한편, 사회적 실천을 위한 가장 절실한 것으로서 선생이 제시한 것이 바로 '의'이다. 선생이 항상 차고 다니는 칼에다 새긴 글이 '내명자경 외단자의(內明者敬 外斷者義: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밖으로 행동을 결단하는 것은 의이다.'라는 것에서 내적 수양을 통한 사회적 실천의 결연한 의지를 볼 수 있다. 주역에서 말한 '直'과 '方'을 이 칼에 새긴 글에서 '明'과 '斷'으로 바꾸어 표현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 바, 이는 경전을 재해석하여 역사적 현실 속에서 자기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제자들이 기록한 글에 두루 보이는 민중 세계에 대한 강렬한 관심과 애정, 그리고 그 처지를 대변하고 나서는 적극성 등에서도 선생의 사회적 실천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엿볼 수 있거니와, 선비가 해야 할 것으로서 음양, 지리 의약 등은 물론 활 쏘고 말달리는 것 등의 공부도 유의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한 점에서 선생의 현실 세계에 대한 인식의 철저함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제자인 김우옹에게 "장부의 거동은 중후하기가 산악과 같고, 만길 절벽같이 우뚝하여야 한다. 때가 오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허다한 사업을 이루어 내어야 한다. 3만 근의 무게가 나가는 쇠뇌는 한 번 발사했다하면 만 겹의 견고한 성도 무너뜨리지만 생쥐를 잡기 위해서는 쏘지 않는다."고 한 말에서 선생의 분명한 출처관은 물론, 내적인 수양과 함께 현실에 대응할 수 있는 실질적인 능력을 중시했던 점을 여실히 살펴볼 수 있다. 남명 선생이 산해정에 기거할 때 '남해정에 대를 심으며'라는 제목의 시를 소개한다



種竹 山海亭

此君孤不孤

髥未則爲隣

莫待風霜看

湱湱這見眞




대나무가 외로운가 외롭지 않은가?
소나무와 이웃이 되었네
풍상 치는 때 보려고 하지 말게나
살랑거리는 모습 속에 참된 뜻 보겠네.


남명 조식 선생의 발자취는 경남 전역에 분포된다 ,산해정은 남명(南冥) 조식선생(曺植先生)이 18년 동안 학덕(學德)을 닦고, 제자 (弟子)를 가르치던 하나의 서원(書院)이다. 특히 산해정(山海亭)이라 이름한 것은, 높은 산에 올라 바다를 굽어 본다는 뜻으로 학문(學問)을 닦아 경지(境地)가 높아지면 그의 경륜(經綸)과 도량(度量)이 바다와 같이 넓어 진다는 것을 표방(標榜)으로 해서 쓴 것이다.

현재 산해정의 위치는 경남 김해군 대저면 주부동 (慶南 金海郡 大渚面 主簿洞)인데 당시(當時) 이 산해정(山海亭) 안의 당명(堂名)은 계명(繼明)이었고 방 안에는 「용신용근, 한사존성, 악립연충, 엽엽춘영(庸信 庸謹, 閑邪存誠, 岳立淵沖, 燁燁春榮)」라는 좌우명(座右銘)을 써 붙이고, 오로지 자기성취(自己成就)에 몰두하였다. 남명(南冥)은 여기서 한편으로 제자들을 가르치기도 했으니 정서암(鄭棲庵), 정매촌(鄭梅村), 정내암(鄭萊庵), 이도 구(李陶丘), 권원당(權源塘), 노입재(盧立齋) 등이 이때의 학생으로서 말하자면 남명(南冥) 조기제자(早期弟子)들인 것이다.

산해정이 갖는 사적(史蹟)으로서의 의의(意義)는 남명(南冥)선생 최초(最初)의 학문연구지(學問硏究地)요, 당시 을 묘을사(乙卯乙巳) 양사화(兩士禍)로 퇴상(頹喪)했던 사기(士氣)를 다시 모아 일으키는데 구심점(求心點)이 되었던 사기진작(士氣 振作)의 발상지(發祥地)였다는 데 역사적(歷史的)으로 특히 학술교육사상(學術敎育史上) 중요한 의의(意義)를 갖는다.
건립연대(建立年代)는 1531년(약 450여년전) 이다.

또한 경남 합천군 삼가면 토동 (慶南 陜川郡 三嘉面 兎洞) 에 가면 뇌룡정(雷龍亭)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유래는 (由來) 조선명종(朝鮮明宗) 때의 대현(大賢) 남명(南冥) 조식선생(曺植先生)이 12년 동안 학문(學問)을 닦고, 제자( 弟子)들을 길렀던 당시 사림(士林)의 총본산(總本山)이다.

뇌룡정(雷龍亭)은 고요하기가 깊은 연못같다가도 잠겨있는 용(龍)이 한 번 소리치면 우뢰와 같이 천지 를 뒤흔든다는 뜻이다. 퇴상(頹喪)했던 사기를 진위(振位)시키고 한편으로는 언론(言論)을 발(發)하여 국정(國政)을 비판 (批判)하고 개혁(改革)을 꾀하는, 이를테면 당시 사림청의(士林淸議)의 후설(喉舌)로 자처한 여론기관(輿論機關)이었다.

남명(南冥)선생은 여러 번의 벼슬을 사양하고 그때마다 국정(國政)을 비판(批判)하는 글을 올렸는데, 조정(朝廷)의 왕공대신(王公大臣) 들을 놀라게 하고 전국유생(全國儒生)들의 손에 땀을 쥐게 했다는 유명(有名)한 「단성소(丹城疎)」가 바로 이 뇌룡정(雷龍亭) 에서 이루어졌다. 여기에서 배운 학생(學生)은 뒷날 각기 일가(一家)를 이룬 대학자(大學者)들이었다.

이곳이 사적(史蹟)으로서 갖는 의의는(意義) 남명 선생(南冥 曺植先生)이 학문연구(學問硏究)와 아울러 산림처사(山林處士)로서 국정(國政)을 비판(批判)하고 경륜(經綸)을 펴던 곳으로, 조선(朝鮮)의 사림정치(士林政治)와 선비 정신 (精神)이 실제료 발현(發現)되었던 곳이 또한 이곳이다, 건립연대(建立年代)는 건립연대(建立年代)는 1548년(약 435여년전)이다.

또한 경남 산청군 시천면 원리 (慶南 山淸郡 矢川面 院里)에 가면 덕천서원(德川書院)이 있는데 그 유래(由來)는 남명조식(南冥曺植) 선생(先生)이 죽은 뒤 그의 제자(弟子)들에 의해 건립(建立)된 서원(書院)이다. 처음에는 덕산서원(德山書院)이라 이름하여, 도산(陶山), 옥산(玉山)과 더불어 삼산의 하나로서 당시의 규모는 삼산(三山)중 가장 컸다고 한다.

처음에는 남명조식선생(南冥曺植先生)의 위패(位牌)만을 봉안(奉 安)했다가 최수우당(崔守愚堂)이 사절(死節)하자 수우당(守愚堂) 최선생(崔先生)을 종사(從祀)했다. 10년후(年後)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 병화(兵火)로 소실(燒失)되자 진백곡(陳栢谷), 이모촌(李茅村), 하창주(河滄洲) 등 이 중건(重建)했으며 광해원년(光海元年 1609)에 사액(賜額)되었다.

그후 이 서원(書院)은 경상우도(慶尙右道) 유림(儒林)의 본 산(本山)으로서 춘추(春秋)에 한 번씩 회강(會講)이 있었으며 회강시(會講時)의 「청금록(靑襟錄)」(院生錄) 7권(卷)이 전(傳)한다. 정조(正祖) 때의 명신(名臣) 채번암(蔡樊岩)이 판서(判書), 영상(領相)을 지낼 때 각각 원장(院長)을 맡아보는 등 일시(一 時)의 성황(盛況)을 이루었었다.

지금 남아있는 건물(建物)은 숭덕사(崇德祠), 경의당(敬義堂), 동무(東무), 시정문(時靜門), 세심정(洗心亭)이 있는데 수년전 국가보조(國家補助)로 담장과 홍전문(紅箭門), 서무(西무), 관리인사(管理人舍)가 지어졌다. 이곳이 사적(史蹟)으로서 갖는 의의(意義)는

우리나라 유림(儒林)은 서원(書院)을 중심(中心)으로 조직(組織)되고 서원(書院)을 뿌리로하여 인재교육(人材敎育)과 청의(淸議 )가 집약(集約)되었다. 그러한 기능(機能)을 담당한 서원(書院)중 가장 손꼽히던 곳이 이른바 삼산(: 陶山, 玉山, 德山) 서원(書院) 이었다.

또한 덕천서원(德川書院)은 남명선생(南冥先生)이 만년(晩年)에 인재(人材)를 길러내던 산천재(山天齋)와 2Km 거리에 있어 남명선생(南冥先生)의 유덕(遺德)을 숭모하였다. 사적지(史蹟地)로 지정되어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산 역사적(歷史的) 교훈(敎訓)을 주고 있다.건립연대는 건립연대(建立年代)는 1575년(약 410년전)이다

또한 경남 산청군 시천면 사륜동(慶南 山淸郡 矢川面 絲綸洞) 여재실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 여재실(如在室)의 유래(由來)는 남명 조식선생(南冥 曺植先生)의 가묘(家廟)이다. 남명선생(南冥先生)의 묘소(墓所)가 있는 산록하(山麓下) 산천재(山天齋) 뒤에 위치(位置)하고 있으며 지금 남아있는 건물(建物)로는 가장 오래되었다.

여재(如在)란 『예기(禮記)』『중용(中庸)』의 「귀신(鬼神)의 성덕(盛德)이 지극하도다. 보아도 보이지 아니하고 들어도 들리 지 아니하며 만져도 만져지지 아니하나……넓고 넓게 마치 우리의 머리 위 그리고 우리의 좌우(左右)에 여실(呂實)히 계신다.」 고 한 말을 따다가 이름한 것으로 남명 조식선생(南冥 曺植先生)의 신위(神位)를 모시고 춘추(春秋)로 제향(祭享)을 올리는 곳이 다.

옛날부터 인생(人生)이 세상에서 살다가 남기고 간 것 중에 영원(永遠)히 썩지 않는 것을 셋 들고 있는데, 덕·언·공(德言功) 이 그것이다. 남명선생(南冥先生)은 도덕군자(道德君子)로서 덕(德)을 갖추고 대학자(大學者)로서 학(學)을 이루었으며, 제자(弟 子)들을 길러 국가동량지재(國家棟樑之材)로 만들었고, 직절강개(直截慷慨)한 언론(言論)을 발(發)하여 나약한 선비를 부기(扶起 )하고 완악한 관리(官吏)를 청렴(淸廉)케 하였으니 그 공(功) 또한 적다할 수 없다.

덕·언·공(德言功) 중에 하나만 있어도 만 민(萬民)이 오래도록 향화(香火)를 받드는 것이 고금(古今)의 긍식(矜式)이다. 하물며 덕·언·공(德言功) 삼불후(三不朽)를 모 두 갖춘 분에 대해서랴! 그러므로 여재실(如在室)이 비록 조씨(曺氏)들의 가묘(家廟)이나 이는 누구나가 참배할 수 있게 개방(開放)되어 마땅하다. 이곳이 사적(史蹟)으로서 갖는 의의(意義)는

사적(史蹟)이란 이미 지난 역사(歷史)의 진적(陳跡)으로 현재(現在)에서 왕사(往事)를 회고(回顧)하는 대상(對象)에 불과한 것 이지만, 여재실(如在室)은 하나의 가묘(家廟)로서 자취라기 보다는 아직도 진행(進行)되고 있는 실재(實在)이므로 사실상 사적( 史蹟)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의식(意識)이 항상(恒常)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사물(事物)도 영원(永遠)한 것은 없으므로 여재실(如在室)의 건물(建物)은 보수(補修)를 요(要)하는 사적(史蹟)임에 틀림없고, 그것이 잘 보수(補修)되고 보전(保傳)될 때, 대현(大賢)을 제 향(祭享)하는 의식(意識)도 새로워지는 것이다.

옛날 대현(大賢)을 모시는 가묘(家廟)가 어떠한가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보여 줄 필요도 있고, 향현(享賢)의 의의(意義)를 되 살려 인간교육(人間敎育)의 근본이 되는 심성(心性)을 맑게 하는데 산 교육의 자료로서 의미 있는 곳이다. 이곳의 건립연대(建立年代)는 1572 년(약 410년전)이다

덕산(德山)을 들어가는 입구를 자세히 보면 입덕문(入德門)이 있다. 지금 거기에는 큰 소나무와 참나무가 서 있고 입덕문(入德門)이라 새 겨진 큰 바위가 있다. 사륜동(絲綸洞) 뒷산등성이에 남명선생(南冥先生)의 묘소(墓所)가 있다. 여재실(如在室)과 산천재(山天齋) 사이 도로변(道路邊)에 송우암(宋尤庵)이 지은 남명선생신도비 (南冥先生神道碑)가 존재한다.

율곡 선생은 일찌기 『근래의 선비 중 끝까지 지조를 지키고 천길 낭떠러지 같은 기상으로 세상을 내려다본 이로는 남명(南冥)만한 분이 없다』고 말했다. 만약 남명 선생이 어떤 분인지 모르고 우리가 지나갔다면 우리는 남명선생은 우리 문학도들에게 얼마나 억울했을까.

옛말에 이르기를 왕비를 배출한 집안보다 대제학을 배출한 집안이 낮고, 대제학을 배출한 집안보다 문묘배향자를 낳은 집안이 낫고, 문묘배향자를 배출한 집안보다도 처사를 배출한 집안이 낫다고 했다. 그런 처사였다. 당시 영남 성리학계 쌍벽이었던 퇴계는 평생에 처사가 되기를 원하여 죽을 때 영정에 '처사'라고 써주기를 원했다지만 그는 처사 지망생이었지 처사가 아니었다.

남명 선생의 사상은 '경의(敬義)'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무엇보다도 실천하는 것을 중시했다. '알지 못함을 두려워하지 말고 실천하지 못함을 두려워하라' 임진왜란 때 수십 명의 의병장이 그의 문인이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누구나 길가에 있는 거지를 보면 불쌍하다는 생각을 하지만 동전을 건네주는 사람은 적다.

예컨대 남명 선생의 가르침은 '동전을 건네주는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말 앞세우기를 좋아하는 요즘, 우리가 절실히 느끼고 깨달아야 하는 남명 정신의 중심이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 모두는 이렇게 위대하고 훌륭하신 분을 왜 지금까지 알지 못하고 있었을까. 현재 의령에 가면 자굴산 명경대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 아름다운 시 한구절이 있다.


높다란 명경대 공중에 솟게 한 이 누구인가
하늘 받치는 기둥 부러져 이 골짜기에 박혔네.
푸른 하늘 내려오지 못하게 떠받치며
해 돋는 곳까지 시원히 통하고 있네.
속세 사람 찾아오는 것 싫어해 구름이 막아 있고,
귀신이 시기할까봐 나무들이 에워쌓네.
내가 주인 되고자 하늘에 빌고 싶지만
융숭한 하늘 은혜 세상에서 질투하면 어쩔꼬.

남명 선생은 연산군 7년(1501)에 합천에서 태어나 제헌릉 참봉, 종부사 주부, 55세때 단성 현감 등의 벼슬이 내려졌으나 사양하고 61세에 산청 덕산으로 옮겨와 학문연구와 후진양성, 백성의 걱정으로 평생을 보냈다. 선생은 72살 그러니까 1572때인 선조5년(1572)2월28일 별세하셨다. 선생이 별세하자 사간원 대사간의 벼슬이 추증되었으며, 다시 광해군 7년(1615)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문정의 시호가 내려졌다.

남명 선비로서의 사표(師表)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임란 때 그의 문하에서 수많은 의병장들이 나와 나라를 구하고, 이는 훗날 광복정신으로 계승되었다. 일제강점기에 3.1만세의거 민족 대표 중 유림계가 빠진 것을 안타까이 여긴 뜻있는 국내 유림들이 중심이 되어 독자적으로 자주독립에 대한 의지를 만천하에 천명한 [巴里長書事件] 즉 유림단사건(儒林團事件)의 중심인물인 면우 곽종석(郭鍾錫)을 비롯한 그의 문인들 대부분이 남명이 살았던 지역의 사람들이다. 스승의 인격적 감화가 제자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교실붕괴'라는 말이 나오는 요즘 시대에 정말 생각해 볼 일 이다.

마음을 밝게 하는 것이 경이며, 바깥으로 과단성 있게 행동하는 것이 의라는 뜻의 글귀인 [內明者敬 外斷者義]를 새긴 보검과 성성자라는 방울을 항상 차고 다니면서 자신을 경계하였다. 허리에 칼과 방울을 찬 선비. 우리 나라 성리학자들이 대개 내적인 마음 수양을 강조한 나머지 [敬]공부에 치중하여 [義]를 [敬]안에 포함하여 일부분으로 취급한 반면, 남명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義]를 따로 드러내 경과 의를 같은 비중으로 생각하는데 그 독특함이 있다.

남명은 경과 의를 하늘의 해와 달에 비유하여 강조하기까지 하였다. 특히 만년에 덕산에서 제자들을 가르칠 때, 기거하던 산천재의 오른쪽 창에 [義]를, 왼쪽 창에는 [敬]을 써 붙여 놓고 교육의 지표로 삼고 임종까지도 자신이 평생 힘썼던 경의정신을 제자들에게 전하였다. 학문한다는 것은 어버이를 섬기고 형을 공경하며 어른에게 공손하고 어린이를 사랑하는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니 책을 통한 이론에만 치우치지 말고 가까운 생활주변에서부터 이론을 실천할 것을 말하였다. 남명 선생이 황계폭포에서, 이러저리 제자들과 수차례 오가며 여러 수의 시를 남기었는데,

황계폭포 2

懸河一束瀉牛津
走石飜成萬斛珉
物議明朝無已迫
貪於水石又於人


달아맨 듯한 한 줄기 물이 은하처럼 쏟아지니
구르던 돌이 어느새 만 섬 옥돌 되었네
내일 아침엔 사람들 논의 그리 각박하진 않으리
물과 돌에 탐을 냈는데 사람에게 탐을 내랴.


남명 선생을 취재하면서 많은 기상들이 떠오른다, 초개같은 기상, 대쪽같은 지조, 항상 앞서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생각했던 남명 조식. 나라보다 자신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고, 사리사욕에 눈멀어 남의 뒤통수치기가 특기인 현대인들. 남명 선생의 유적지를 다녀와서 현대인의 한 사람으로서 정말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남명 선생의 고고한 정신을 후세인들이 본받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시급한 문제는 남명 선생의 유 적지를 잘 복원시키는 일, 그 유적지에는 남명 선생의 숨결과 태산처럼 높았던 정신이 고스란히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많은 작품을 남기지 않았던 선생의 학문적 특성을 보더라도 선생의 면모에 보다 가까이 접근하기 위해서는 생전에 기거했거나 즐겨 찾았던 곳을 보전하는 일이 필수적이다.

청학동(靑鶴洞)

獨鶴穿雲歸上界 一溪流玉走人間
從知無累蒜爲累 心地山河語不看

한 마리 학은 구름을 뚫고 하늘 나라로 올라갔고,
구슬이 흐르는 한 가닥 시내는 인간 세상으로 흐르네.
누(累)없는 것이 도리어 누가 된다는 것을 알고서,
산하를 마음으로 느끼고서 보지 않았다고 말하네.


남명 선생 당시의 세상은 매우 어지러웠다. 그래서 많은 젊은이들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 지 몰라서 망설이고 있었다. 그런 선비들에게 남명의 인격과 곧은 정신, 높은 학문은 밝은 빛이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전국 각지에서 많은 선비들이 남명을 찾아와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김해의 산해정에서 18년동안 공부를 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친 남명을 보고 친구들은 벼슬길에 나가지 않음을 몹시 아쉬워 하였다고 한다.

이런 남명을 보고 성대곡이란 사람은 "정말 잘난 사람은 어지럽고 못된 세상에 물들까봐 숨어 지내는데, 서울에는 못난이들만 남아 명예와 이익을 다투느라 야단이구나" 라고 한탄 했다고 한다. 남명선생 ! 그는 더러운것에 물들지 않고 옳지않은 세상을 바로 잡는 일은, 사람되는 공부를 열심히 하고 많은 젊은이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길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였음에 틀림없다.


삼동에 배옷입고 암혈에 눈비 맞아
구름낀 볕뉘도 쬔 적이 없건마는
서산에 해 진다하니 눈물겨워 하노라.

이 시조는 남명 선생이 명종 임금이 돌아가신 슬픔을 나타낸 글이다. 남명선생의 모든 글에서 보듯 작품이 매우 매끄러운것을 느낄것이다. 이는 학문이나 시조의 경지에서도 어느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높은 학문과 달인을 뜻하는 것이다. 1554년 명종이 돌아가셨다.

남명은 벼슬을 한 일이 없고 나라의 은덕이나 임금의 사랑을 받은 일은 없었지만, 나라 사랑과 임금에 대한 충성심이 남명을 슬프게 했던 것이다. 상위 시조에서 '삼동'은 겨울의 석달을 말하지만 그 표하는 뜻은 어지러운 세상이라고 할 수 있다. '암혈'은 바위틈의 조그만 거처라는 뜻이니 매우 작은 집에서 살았음을 나타낸다.

'베옷'은 삼베옷이란 뜻이며 '볕뉘'란 아주 엷고 보잘 것 없는 햇빛인데 그 품은 뜻은 임금의 작은 사랑을 나타낸다고 하겠다. '해 진다 하니'에서 '해'는 명종 임금을 나타내며 '진다'는 말은 죽음을 뜻한다. 이 시조를 풀어보면, 한 겨울 -어지러운 세상을 뜻함- 에 삼베옷을 입고 아주 작고 보잘 것 없는 집에서 가난하게 사는 선비가 나라나 임금으로부터 입은 은덕은 아무것도 없지만 임금님이 돌아가셨다 하니 몹시 슬프다는 뜻이다.

이 글 한 수로 보더라도 남명의 충성스러움이 얼마나 깊었으며, 나라의 형편을 얼마나 걱정했는지를 잘 알 수가 있다. 남명의 제자들은 그의 인격과 덕망, 그리고 학문을 우러러 보고 모여 들었기 때문에 스승의 가르침에 충실히 따랐다. 그리하여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훌륭한 일을 한 제자가 많이 배출되었다. 그 중에서도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구국대열의 앞장에 선 제자는 망우당 곽재우를 비롯하여, 내암 정인홍, 송암 김 면, 대소헌 조종도, 송암 이 로 등 57여명이나 된다.

그러나 취재 도중 한가지를 알게 되었는데 남명선생의 폄하는 수제자 정인홍에 대한 의도적인 사실 왜곡에 의해 더욱 가속화되었다고 한다.이 밖에 남명학 왜곡의 또 다른 배경으로 남명이 상소문을 통해 수시로 왕가와 중앙 훈척들을 질타함으로써 많은 적들이 생겨난 점,

남명이 너무 고상하고 신기한 행동을 즐겨했다는 이유를 들어 그를 제대로 평가하려 하지 않았던 퇴계 이황 제자들의 시각, 남명의 문집이 여러 차례 개수되면서 남명학의 전모가 많이 사라진 점등을 들 수 있다.아래는 남명이 보낸 상소문이다. 제법 긴 장문의 글이지만 한글로 해석해 놓은 것이니 이 기회에 조정에 상소문 어떻게 보냈을까 하는 의구심을 풀게된다.

<상소문>

단성소(丹城疏)

「선무랑(宣務郞)으로 새로 단성현감에 제수된 조식은 진실로 황공하여 머리 조아려 주상전하께 소를 올립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돌아가신 임금님(중종)께서 신이 보잘것없는 줄 알지 못하시고 처음에 신을 참봉에 제수 하셨습니다. 전하께서 왕위를 계승하셔서는 신을 주부에 제수한 것이 두 번이었고, 이번에 또 현감에 제수하시니 신은 떨리고 두려워 마치 큰산을 짊어진 것 같아 감히 인재등용에 정성을 쏟고 계시는 임금님 앞에 나아가 하늘의 해와 같은 그 은혜에 감사 드릴 수 없습니다.

신이 생각하건대, 임금이 인재를 등용하는 것은 마치 대목이 목재를 취해 쓰는 것과 같습니다. 깊은 산 큰 골짜기에 버려지는 재목이 없도록 모든 좋은 재목을 다 구해다가 훌륭한 집을 이루는 것은 대목에게 달렸지 나무가 스스로 참여할 일은 아닙니다. 전하께서 인재를 등용함은 한 나라를 맡아 다스리는 책임입니다. 전하의 인재를 등용하려는 큰 은혜를 감히 사사로운 일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만. 신은 혼자서 걱정되어 견딜 수 없는 지경이므로 신이 머뭇거리며 벼슬길에 나가기를 어려워하는 뜻을 전하께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벼슬길에 나가기 어려워하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첫째는, 신은 나이가 예순에 가깝고 또 학문이 엉성하면서도 어둡습니다. 신의 문장실력은 전날에 과거의 끝자리에도 끼지 못했고, 신의 행실은 물 뿌리고 비질하는 예절도 갖추지 못했습니다. 과거에 합격하려고 10년 동안 노력했지만 세 번 실패하고서 그만두었으니 애초부터 지조 있게 과거를 일삼지 않은 사람도 아닙니다. 가령 과거 합격을 탐탁찮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조그마한 절개나 지키는 선량한 사람에 불과할 뿐 크게 나라를 위해 무슨 대단한 일을 할 수 있는 훌륭한 인재가 아닙니다.

그러니 어떤 사람이 훌륭한가 형편없는가 하는 것은 결코 과거에 합격하기를 바라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이 과거를 통해서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고 해서 신을 대단하게 보실 아무런 이유도 없습니다. 보잘것없는 신이 명예를 도둑질해서 담당관리의 눈을 속였고, 담당관리는 저의 거짓 이름을 잘못 듣고서 전하를 그르쳤습니다.

전하께서는 신을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십니까? 도(道)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문장에 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문장에 능한 사람이라고 꼭 도가 있는 것은 아니고, 또 도가 있는 사람은 신처럼 이렇지 않습니다. 전하께서 신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정승도 또한 신을 알지 못합니다. 그 사람됨도 모르면서 그를 등용한다면 훗날 국가의 수치가 될 것이니 그 죄가 어찌 이 보잘것없는 신에게만 있겠습니까?

신이 거짓된 이름을 바쳐 몸을 팔아 벼슬에 나가는 것이 진짜 곡식을 바쳐 벼슬을 사는 것보다 어찌 나을 수 있겠습니까? 신은 차라리 이 한 몸을 저버릴 수는 있어도 전하를 져버릴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신이 벼슬길에 나가기 어려워하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전하. 나랏일은 이미 잘못되었고 나라의 근본은 이미 없어졌으며 하늘의 뜻도 이미 떠나버렸고 민심도 이미 이반되었습니다. 비유컨대, 큰 고목나무가 100년 동안 벌레에 속이 패어 그 진이 다 말라버려 언제 폭풍우가 닥쳐와 쓰러질지 모르는 지경에 이른 지 이미 오래입니다.

조정에서 벼슬하는 사람들 치고 충성스런 뜻을 가지고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부지런히 일하지 않는 이 없지만, 나라의 형세가 아주 위태로워 사방을 둘러보아도 손 쓸 곳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낮은 벼슬아치들은 아랫자리에서 히히덕 거리며 술과 여색에만 빠져 있습니다. 높은 벼슬아치들은 윗자리에서 빈둥빈둥거리며 뇌물을 받아들여 재산 긁어모으기에만 여념이 없습니다. 오장육부가 썩어 물크러져 배가 아픈 것처럼 온 나라의 형세가 안으로 곪을 대로 곪았는데도 누구 하나 책임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내직의 벼슬아치들은 자기들의 당파를 심어 권세를 독차지하려 들기를, 마치 온 연못 속을 용이 독차지하고 있듯이 합니다. 외직에 있는 벼슬아치들은 백성 벗겨 먹기를, 마치 여우가 들판에서 날뛰는 것같이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가죽이 다 없어지고 나면 털이 붙어 있을 데가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백성을 가죽에 비유한다면 백성으로부터 거두어들이는 세금은 털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신이 자주 낮이면 하늘을 우러러 깊이 탄식하고 밤이면 천장을 바라보고 답답해하며 흐느끼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대비(문정왕후)께서는 신실하고 뜻이 깊다 하나 깊은 구중궁궐의 한 과부에 불과하고, 전하는 아직 어리니 다만 동아가신 임금님의 한 고아에 불과합니다. 백 가지 천 가지로 내리는 하늘의 재앙을 어떻게 감당하며 억만 갈래로 흩어진 민심을 어떻게 수습하시겠습니까? 냇물이 마르고 하늘에서 곡식이 비처럼 떨어지니 하늘의 재앙은 이미 그 징조를 보였습니다. 백성들의 울음소리는 구슬퍼 상복을 입은 듯하니 민심이 흩어진 형상이 이미 나타났습니다.

이런 시절에는 비록 주공(周公)같은 분의 재주를 겸하여 가진 사람이 대신의 자리에 있다 해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풀잎이나 지푸라기처럼 보잘것없는 신 같은 사람이겠습니까? 신은 위로는 만에 하나라도 나라의 위태로운 사태를 붙들 수 없고 아래로는 털끝만큼도 백성들을 보호랄 수 없으니 전하의 신하되기는 또한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조그마한 헛된 이름을 팔아서 전하께 벼슬을 얻는다 해도 그 녹을 먹기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신이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이점이 신이 벼슬하러 나가기 어려워하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또 신이 요사이 보니 변경에 일이 있어(왜구의 침략으로 전라도 일대가 함락된 을묘사변을 말함) 여러 높은 벼슬아치들이 제때 밥도 못 먹을 정도로 바쁜 모양입니다만, 신은 놀라지 않습니다. 이 일이 벌써 20년 전에 일어날 일인데도 전하의 신성한 힘 때문에 지금에 와서야 비로소 발발한 것이지 하루아침에 갑자기 발발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평소 조정에서 뇌물을 받고 사람을 쓰기 때문에 재물은 쌓이지만 민심은 흩어졌던 것입니다. 결국 장수 가운데 자격을 갖춘 자가 없고 성에는 수성할 군졸이 없으므로 왜적이 무인지경에 들어온 것입니다. 어찌 이상한 일이겠습니까?

이번 사변도 대마도 왜놈들이 몰래 결탁하여 앞잡이가 되었으니 만고에 씻지 못할 큰 치욕입니다. 전하께서는 영묘함을 떨치시지 못하고서 그 머리를 재빨리 숙였습니다. 옛날에 우리나라에 대해서 신하로 복종하던 대마도 왜놈들을 대접하는 의례가 천자의 나라인 주나라를 대접하는 의례보다 더 융숭합니다. 원수인 오랑캐를 사랑하는 은혜는 춘추시대 송나라보다 한술 더 뜨십니다. 세종대왕 때 대마도를 정벌하고 성종대왕 때 북쪽 오랑캐를 정벌하던 일과 비교하여 오늘날의 사정은 어떻습니까?

그러나 이런 일은 겉으로 드러난 병에 불과하지, 가슴속이나 뱃속의 병은 아닙니다. 가슴속이나 뱃속 병은 덩어리지고 막혀서 아래위가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랏일을 맡은 공경대부들이 이 문제점을 해결해보려고 목이 마르고 입술이 타 들어갈 정도로 열심히 노력하였지만 형편은 나아지지 않아, 백성들 가운데 수레가 있는 이들은 수레를 타고 피난 가고 수레가 없는 이들은 달려서 피난가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에게 호소하여 군사를 불러모아 전하를 위해 부지런히 일하게 하고 나랏일을 정리하는 것은 자질구레한 형벌제도 따위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오직 전하의 마음 하나에 달려있습니다. 마음을 극진히 하면 그 효과를 크게 기대할 수 있는바, 그 틀은 전하에게 달려 있을 따름입니다.

모르겠습니다. 전하께서는 무슨 일에 종사하시는지요? 학문을 좋아하십니까? 풍악이나 여색을 좋아하십니까? 활쏘기나 말타기를 좋아하십니까? 군자를 좋아하십니까? 소인을 좋아하십니까? 전하께서 좋아하시는 것이 어디 있느냐에 나라의 존망이 달려 있습니다.

만약 하루라도 능히 새로운 정신으로 깨달아 분연히 떨쳐 일어나 학문에 힘을 쏟으신다면, 하늘이 부여한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을 날로 새롭게 만드는 일에 얻으시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하늘이 부여한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만드는 일 안에 모든 착한 것이 다 포함되어 있고, 모든 교화도 거기로부터 나옵니다.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일을 거행한다면 나라는 고루 잘 다스려질 것이고 백성들은 화합하게 될 것이며 나라의 위기도 안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일을 요약해서 잘 간직한다면 사람을 알아보거나 일을 판단함에 거울처럼 맑고 거울처럼 공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생각에 사악함이 없어질 것입니다.

불교에서 이른바 진정(眞定: 참된 경지의 선)이라 하는 것도 단지 이 마음을 간직하는 것에 있을 따름입니다. 위로 하늘의 이치를 통달함에 있어서는 유교나 불교가 한가지입니다만, 일에 적용할 때 불교는 그 발디딜 곳이 없다는 점이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 유가에서는 불교를 배우지 않습니다. 전하께서는 이미 불교를 좋아하고 계신데 그 불교를 좋아하시는 마음을 학문에 옮기신다면 공부하는 것이 우리 유가의 것이 될 것이며, 그것은 마치 어려서 집을 잃은 아이가 그 집을 다시 찾아 부모. 친척. 형제나 옛 친구 등을 만나보게 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더욱이 정치하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전하 자신의 경험으로 인재를 선발해 쓰시고 도로써 몸을 닦으십시오. 전하께서 사람을 취해 쓰실 때 솔선수범 하신다면 전하를 가까이서 모시는 신하들이 모두 사직을 지킬 만한 사람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사람을 취해 쓰실 때 눈으로 본 것만 가지고 하신다면 곁에서 모시는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전하를 곡이거나 져버릴 무리로 가득 찰 것입니다. 그런 때가 되면 굳게 자기 지조라도 지키는 고견 좁은 신하인들 어찌 남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뒷날 전하께서 정치를 잘하셔서 왕도정치의 경지에까지 이르신다면, 신은 그런 때에 가서 미천한 말단직에 종사하며 심력을 다해서 직분에 충실하면 될 것이니 어찌 임금님 섬길 날이 없기야 하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반드시 마음을 바로잡는 것으로서 백성을 새롭게 하는 바탕을 삼으시고, 몸을 닦는 것으로서 인재를 취해 쓰는 근본을 삼으셔서, 임금으로서의 원칙을 세우십시오. 임금이 원칙이 없으면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게 됩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전하께서 신의 상소를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신은 두려워 어쩔 줄 몰라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나이다」

때론 지나치게 과격했다는 평을 듣기도 했던 남명, 그러나 그것이 그의 진면목일 수는 없다. 광해군과 함께 조선의 정치 경제 문화적 안정과 번영을 위해 민본정치를 펼쳤던 인물, 이것이 바로 남명 조식이다. 수제자로 인해 오히려 자신의 학문과 정신이 부당하게 평가절하 돼야만 했던 남명, 그의 비극은 4백 년이 넘도록 치유되지 못한 채 아직도 그대로 여전히 남아 있다.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니 역사란 문명과 문화가 지나간 자취라고 간단히 설명하고 있다. 역사가 도전과 응전이듯이 그 속에는 흥망성쇄가 되풀이된다. 과거가 흥했다고 기뻐할 일도 아니고, 쇄했었다고 슬퍼할 일도 아니다. 역사는 과거의 잘못과 지혜를 바로 알아 온고지신해서 오늘과 내일을 열수 있는 열쇠다.

그래서 역사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가깝게는 부모님의 할머니의 이야기이며,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오늘이 내일이면 역사가 된다. 그러나 내가 배운 국사는 온통 전쟁에서 이긴 영웅들과 왕들에 대한 이야기여서, 나하고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처럼 느껴졌다. 역사의 뒤안길에 섰던 사람들과 서민들은 초점에서 벗어나 있다. 아래에 남명의 원천부를 둔다

원천부(原泉賦)

惟地中之有水 땅속에 물이 있는 것은,
由天一之生北 천일(북극의 신)이 북쪽에서 생기기 때문이다.
本於天者無窮 하늘에 근본을 둔 것은 다함이 없나니,
是以行之不息 이 때문에 쉬임 없이 흐르는 것이다.
徵一泉之 沸 한 샘물이 솟아나는 것을 보면,
異杯水之 覆 길가에 고인 물과는 다르다.
縱初原之涓涓 애초에는 졸졸 솟구치는 물에 불과하지만,
委天地而亦足 천지를 다 적셔도 넉넉하다.
非有本則不然 근본이 없다면 그렇지 아니하리니,
類人身之運血 사람 몸에 피가 도는 것과 같다네.
或一暫之止息 혹여 잠시라도 멈추게 되면,
天地亦有時而潰裂 때로는 우주의 질서가 파괴되기도 하지만,
同不死於谷神 곡신과 같이 영원히 죽지 않으니,
實氣母之沆瀣 실로 기모(氣母)의 항해(沆瀣)와 같도다.
故祀典之崇本 그러므로 제사의 법전에서도 근본을 숭상하여,
必先河而後海 반드시 황하에 먼저 제사하고 바다는 뒤로하였다.
思 稱於宣尼 공자가 자주 물을 일컬었던 점을 생각하니,
信子輿之心迪 근본이 있다는 뜻으로 이해한 맹자의 마음을 믿을 만 하구나.
推 水於習坎 웅덩이를 채우고 난 뒤에 흘러가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宜德行之素積 평소에 덕행을 쌓는 것이 마땅하리라.
究人事之下行 일상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는 일을 연구하는 것이,
根天理之上達 오묘한 이치에 도달하는 근본이 된다.
萬理具於性本 온갖 이치가 다 본성에 갖춰있어,
混潑潑而活活 운용에 따라 모두가 활발해 진다.
隨取用而有餘 필요에 따라 취하여 써도 남음이 있는 것이,
猶窟宅之生出 마치 물이 지하에서 솟아 나오는 것과 같다.
合川流而敦化 작은 덕은 흐르는 냇물 같고 큰 덕은 무궁한 조화를 이루니,
皆大本之充實 모두가 근본을 충실히 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配悠久於博厚 무궁한 조화의 덕은 광박 심후한 땅과 대비되니,
歸萬殊於一極 만물의 다양함이 한 가지 이치로 귀결이 된다.
是誠者之自然 이는 지극한 정성이 자연스레 나타나는 것,
河漢浩而莫測 은하수처럼 아득하여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도다.
濬不喩於天淵 그 깊은뜻, 높은 하늘 깊은 연못으로도 다 비유할 수 없어,
但魚躍之洋洋 다만 물고기가 자유롭게 뛰노는 것으로 비유하였다.
發大原於崑崙 큰 근원이 곤륜산에서 발원하여,
彌六合其無方 온 천지 사방에 가득 퍼진다.
巨浸稽天而漫汗 큰 물결 하늘에 닿을 듯이 도도히 흘러가면,
曾不撓以使濁 결코 물길을 바꾸거나 흐리게 할 수 없으며,
火輪 土而爀烈 태양이 땅을 태울 듯이 강력히 내리쬐면,
庸 殺其一勺 누가 한 바가지 물로 그 기세를 꺾으랴!
而君子之致曲 그래서 군자는 선의 한 단서를 미루어 극진히 하나니,
尤有大於立本 이 경우 근본을 세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學不積則不厚 또한 학문이란 쌓지 않으면 두터워지지 않으니,
等聚 而海問 비유컨대 오줌을 받아놓고 바다를 묻는 것과 같다.
苟靈根之不渴 진실로 신령한 뿌리가 마르지 않으면,
沃九土其難 천하를 적시고도 마르기 어려우리,
見寒泉之勿幕 덮어 놓지 않은 샘의 차가운 물을 보라.
人百 其猶若 아무리 퍼내어도 여전하지 않은가!
戒曰 경계하노니,
心以應事 마음으로 세상만사에 대응하면,
百感搖挑 온갖 물욕의 감정이 마음을 흔들고 돋운다.
學以爲本 학문으로 근본을 삼으면,
感罔能擾 물욕의 감정이 마음을 흔들지 못한다.
可汨則無本 물욕의 감정에 빠져 버리면 근본이 없어지며,
可擾則用熄 물욕의 감정에 흔들리면 쓰임이 없어지리라.
敬以涵源 경으로써 그 근원을 함양하고,
本乎天則 하늘의 법칙에 근본해야 하리라.

요즘 우리 나라 역사는 단군왕검이 건국한 고조선부터가 아니라 그 이전에 약 4000년이 더 있으며 삼국시대 영토가 지금의 중국지방이었다는 설이 있다. 그것이 왕조가 바뀌면서 지배자에게 유리하게 쓰여졌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외세 침략 때 우리나라 국사가 중화사관과 식민사관으로 상당 부분 왜곡되었다는 것이다.

일본교과서 우리역사왜곡을 탓하기에 앞서 우리 국사부터 바로잡을 일이다. 언젠가 제대로 된 우리역사를 배우고싶다. 그 역사는 역사의 뒤안길에 섰던 사람과 서민에 초점을 둔 역사말이다. 남명 역시 그 동안 역사에 숨어있었고,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사람이니 만큼 재해석 되어져야 한다.

 
 

Total 374
번호 제   목 글쓴이 날짜 조회
공지 틀리기 쉬운 漢字表記 운곡 01-08 5469
94 국보1호부터100호까지(月雲선생제공) 雲谷(정리 편집) 12-08 2566
93 五자의 의미 운곡 11-18 2510
92 한획의 글자들 운곡 11-10 2519
91 운곡의 한자공부-3 痴癡 운곡 11-04 2657
90 운곡의 한자공부-2 天 운곡 11-04 2512
89 운곡의 한자공부-安 운곡 11-04 2774
88 지구의 야경 운곡 10-23 2629
87 우리가락 우리시조 雲谷 10-12 2915
86 선시 운곡 08-15 3221
85 德溪 吳健과 道學의 이해/이범직 운곡 08-15 2284
84 논평문/한명기 운곡 08-15 2670
83 德溪 吳健의 학문과 경세론/유미림 운곡 08-15 2425
82 德溪 吳建의 ‘義로움’의 개념/이명곤 운곡 08-15 2603
81 남명 조식 선생 운곡 08-15 3510
80 우주의 신비(펌) 홈쥔 07-03 3010
79 천수경 운곡 05-20 2593
78 宋詩習字송시습자 운곡 04-22 3853
77 暮宿半塗(한시) 운곡 04-18 3098
76 당신을 위한 發願文 운곡 04-10 3304
75 金剛般若波羅密經 (2) 雲谷 03-07 3549
   11  12  13  14  15  16  17  18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