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書畵 雲谷 姜張遠

 

 
작성일 : 05-08-15 11:14
德溪 吳健의 학문과 경세론/유미림
 글쓴이 : 운곡
조회 : 2,425  
德溪 吳健의 학문과 경세론


유 미 림
(이화여대)


1. 서론

본고는 흔히 남명과 퇴계 양 문하를 오가며 두 사람의 사상을 융합한 학자로 일컬어지고 있는 吳健(1521-1574, 호는 德溪, 이하 덕계로 칭하기로 한다)의 학문과 경세론을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덕계의 학문 경향을 일러 흔히 “두 선생의 학문 요지를 포섭 융화하여 독특한 庸學 중심의 도학 실천을 표방”했다고 하여, 남명 문하이자 퇴계 문하인 양 문하생으로서의 융합적 속성을 강조하거나, 아니면 남명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퇴계 문하로 이탈해간 자인 김우옹, 정구, 정탁 같은 부류 중의 한 사람으로 보는 견해 및 남명의 학통을 계승한 長子로 보는 견해들이 있다. 한편 『덕계집』「연보」발문에서 오희상은 “師事南冥 曹文貞公, 又嘗從遊於退陶之門”이라고 하여, 덕계가 남명을 師事하고 퇴계와 從遊한 자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덕계의 학문적 계보는 어떤 것인가. 이는 그의 修學과정을 면밀히 살펴봄으로써 고찰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연구는 덕계의 사상을 특정 시각에서 접근하기 보다는 그의 생애와 사상을 총괄하여 그 大體를 살펴보는 데 치중하였다. 또한 그를 개별 사상가로서 다루기 보다는 남명학파의 일원으로 취급하여 그 위상을 구명해왔다. 인간의 현실 인식은 대체로 학문을 통한 사회화과정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오덕계에 대한 세인의 평가는 결과적으로는 그의 현실 인식 및 이에 근거하여 표출된 행동에 대한 총체적인 평가이다. 이 점에서 그의 수학 과정과 학문 성향, 실천행동은 상호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것이지 분절적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한 학자의 사상이 반드시 그 수학과정에 조응하여 학문적 내지 정치적인 업적을 내는 것으로 결과되는 것은 아님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덕계의 경우도 독학과 師事, 交遊, 從遊, 교육의 형태로 이루어진 학문의 성격은 그의 현실 인식과 경세사상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덕계의 학문이 그의 경세론과 연관되어 있다는 문제의식하에 우선 그의 학문의 형성과정을 살펴보고, 경세론을 고찰해보기로 한다.

2. 수학과정과 학문 경향

대부분의 유학자들이 스승 문하로 들어가 사제관계를 맺고 수학하면서 學統을 형성하던 것과는 달리, 덕계는 가세가 빈곤하고 일찍 선친을 여읜 까닭에 초학기를 대부분 독학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선친이 작고하기 전인 11세 이전에 받은 가르침은 아버지로부터의 『대학』과 『논어』뿐이었다. 그 뒤로는 집안에서 낡은 『중용』한질을 찾아내어 읽기를 수백번, 그야말로 ‘철주철야’함으로써 文意를 통달하게 되었다고 한다. 『대학』과 『중용』에 대한 천착은 이때 이뤄진 것이다. 그런 후에야 덕계는 비로소 『논어』와 『맹자』로 옮겨갔고, 『주역』 및 경․자․사를 침잠 연구하게 된다. 이러한 십대를 보내고 난 뒤 그후 10여년간 정수암에서 보낸 기간은 바로 덕계의 학문이 성숙되는 기간이자 사상적인 지향이 확립되는 기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덕계의 학문은 30세 이전 즉 남명을 만나게 되는 31세에 이미 대체적으로 형성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때는 주로 四書 중심의 강학을 통해 유교 교양과 성리학에 대한 천착이 이뤄졌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를 거치면서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하는 조선에서 체제와 유교와의 밀접성에 대해 그 중요성을 인식했을 것이다.
덕계가 남명을 만나는 시기는 그가 진사 초시에 합격하고 난 뒤의 일이다. 덕산동에서 남명과의 교유에서 흥기된 바는 많았겠지만 이때의 교유는 짧았고, 따라서 덕계의 학문은 초기에는 사승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기보다는 ‘자득’한 경향이 강하다. 이는 덕계 자신의 회고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덕계는 제자들에게 “경학은 사승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얼마나 精思하고 熟讀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하여 스승의 입을 통해서만 지식을 전수받으려 하는 제자들을 나무랐다. 깊은 사색이나 탐독이 없이 얻은 지식은 깊어질 수가 없음을 자신의 체험을 통해 경험했다고 고백한 것이다. 그는 황준량과의 교유를 통해 주자서를 접하고 논할 때에도 先人의 설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또한 자신의 오류를 알게 되면 바로 이를 인정하고 새로운 설을 받아들이려 하였다. 말하자면 학문에 있어서 매우 개방적인 태도로 임했던 것이다. 모든 학문을 철저히 자신의 것으로 소화한 뒤에 수용하고자 했는데 이러한 태도가 오히려 그의 학문을 진일보하게 하였음은 문인들에게도 인정받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덕계에게 남명과 퇴계의 영향은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덕계는 스스로를 남명의 門人으로 자임했듯이 후에는 남명 학통에 입문하게 된다. 그러나 도산 학통에 입문하였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보여진다. 그런데도 이들과의 조우에서 덕계는 그동안의 독학에서는 보기 어려웠던 지적 자극과 상호계발의 중요성을 경험하였고, 나아가 四書 외의 광범위한 학문을 익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결과적으로는 그의 학문을 심화시키고 나아가 출처에서도 분명한 실천가로 향하게 하였다. 두 선생과의 관계에 대해 선행 연구에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즉 덕계는 “당대의 서로 다른 학문 경향을 가진 두 선생의 문하에 출입하여, 남명으로부터 敬義를 위주로 한 下學 중심의 실천 정신을 전수받고, 퇴계로부터는 정심한 理學 체계를 위주한 정주학설의 요체를 전수받아 學行을 겸비, 동시에 仕官과 棄官을 엄정히 하여 올바른 선비의 한 전형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과연 두 사람의 학문적 영향이 덕계의 학문 형성과정에서 또 그 후의 실천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지녔으며 그 과정은 어떠한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우선 덕계는 남명으로부터는 어떠한 영향을 받았을까를 추론해보자. 덕계가 남명의 학문적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면, 이는 아마도 31세때의 조우 이후 문과에 합격하게 되는 38세까지의 7년여동안의 기간에서일 것이다. 남명이 제자들에게 『소학』 『대학』『주역』『심경』을 강조했고, 면려한 과목이 『대학』『중용』『심경』이었다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덕계도 이들 중 『심경』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모두 강학하고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남명의 영향이 강하다고 할 만한 과목은 없다. 따라서 과목만으로 보자면, 덕계가 남명으로부터 배운 것은 오히려 『심경』,『근사록』과 같은 심학적 경향의 서적보다는 『대학』과 『맹자』와 같이 학문의 요체와 치국의 요령을 담은 경세적 서적으로부터 흥기된 바가 더욱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 덕계가 남명에게서 배운 것은 학문도 학문이려니와 남명의 삶을 통해서 출처를 분명히 하는 선비의 모습을 배운 것이 더 컸을 것이다.
남명은 ‘敬義’사상을 강조하였는데, 덕계는 이 경의사상으로부터 실천성을 배웠다. 경의사상은 말하자면 敬의 확산을 통해 義가 성립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의가 확립되기 위해서는 下學을 통한 반궁실천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보아 쇄소응대를 중시하였다. 남명은 쇄소응대의 기본적인 예절도 모르면서 天理를 운운하는 것은 남을 속이는 일이라고 비판하고 이러한 상황이 초래된 책임을 은근히 퇴계에게 돌렸다. 이러한 생각은 이미 덕계에게 보낸 편지에서 피력된 적이 있다. 그는 “斯文의 宗匠이라고 하는 자가 上達에만 힘쓰고 下學을 강구하지 않아 시폐를 구제하기 어려운 습성이 되었다”고 하여 퇴계를 비롯한 성리학자들의 사변적 경향을 비판한 것이다.
남명이 원시유학과 성리학, 양명학, 노장사상이라는 다양한 학문 영역을 포섭하고 있고 이 중에 어느 것에 더 비중을 두었는가에 대해서는 정설이 확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므로 마찬가지로 덕계가 이러한 남명 사상 중 어떤 부분을 집중적으로 수용 혹은 영향받았는가에 대해서 단정하기도 어렵다. 또한 덕계의 문집을 보아도 이러한 부분은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오히려 문집을 보면 표면적으로는 학문적인 논의는 남명보다 퇴계와 주로 한 것을 알 수 있다. 『성리대전』, 『심경』, 『근사록』, 「연평문답질의」와 관련한 내용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남명도 마찬가지로 『근사록』과 『성리대전』을 중시했다. 단지 성리학의 본체론에 관한 형이상학적인 것보다는 실천적인 측면을 중시하였고 ‘章句之學’보다는 ‘自得’을 중시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건대, 덕계는 남명으로부터는 실천적 지향을, 퇴계로부터는 ‘心性之學’의 본령을 습득한 것은 아닌가 하고 추론할 뿐이다.
덕계의 행동지향을 살펴보면, 이를 이름하여 ‘실천적 도학’이라고 일컫고 있다. 그러나 도학은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실천적인 것이며, 따라서 이러한 도학의 실천성을 논할 때 그것이 덕계에게만 보이는 것은 아니고 당시 사류의 보편적인 경향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덕계의 실천적 지향을 도학의 성격과 결부시키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오히려 어떤 환경적 요인이 덕계로 하여금 도학을 실천하는 데 다른 유학자들과 차별될 수 있는지를 밝히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그것은 덕계가 특정의 사승관계에 얽매이지 않았던 자유로운 학문환경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덕계는 특정 사승관계에 얽매이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에 문하의 세계에 들어갔고, 이 때문에 학통에 얽매이지 않고 학문적인 차원에서 순수하게 여러 학자와 교유하고 그들의 영향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덕계는 남명뿐만 아니라 퇴계와 율곡 황준량, 정탁, 서화담, 기대승, 김우옹, 노옥계 등 여러 학자들과 교유하고 이들과의 교유에서 배운 바를 자신의 학문에 수용하였다.
그러나 덕계의 사상형성에서 간과해서 안되는 사람은 남명 외에도 퇴계와 율곡을 들 수 있다. 그가 남명으로부터 ‘口耳之學-踐履之學’ 의 중요성을 배웠다면, 퇴계로부터는 ‘심성지학’ 즉 理學的 경향의 주자학을 전수받았다. 덕계는 퇴계와 교유하기 전에 퇴계의 제자인 황준량을 먼저 만나 주자서를 강학함으로써 주자와 퇴계의 학문을 접하게 된다. 덕계가 성주훈도로서 성주목사인 황준량과 교유하게 되는 시기는 그의 나이 39세이다. 그리고 그가 도산의 퇴계를 방문하게 되는 시기는 그보다 후인 43세때이다. 비록 퇴계와 종유한 시기는 늦었지만 퇴계로부터 흥기한 바가 많았다는 기록으로 볼 때, 덕계가 퇴계와 주자로부터 받은 영향은 남명 못지 않게 컸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덕계의 「정묘일기」에는 율곡이 자주 언급되고 있다. 이로써 보면, 그가 율곡을 존경하여 그의 경세사상을 체인하였을 것임을 짐작케 하지만, 이 역시 덕계가 관직에 참여하게 된 이후의 일이다. 따라서 율곡은 덕계의 수학과정에 영향을 준 인물이라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관직자가 된 덕계가 율곡의 경세사상에 대하여 깊이 공감하여 율곡의 현실정치적 사상을 실천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덕계의 학문은 독학에 의한 ‘자득’적인 성격이 강하다. 단지 학문은 완성이란 없기 에 부단한 연마를 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늦게나마 접하게 된 남명과 퇴계의 사상이 덕계의 학문적 시야를 확대시켜주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덕계의 사상체계를 단순히 두 사람의 학문을 융합․포섭했다고 하는 것만으로는 그 실체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그 실체가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덕계의 사상적 지향이 어떻게 현실에서 적용되고 있었는지가 밝혀져야 할 것이다.
우선 그의 학문과 활동을 연계시켜 이를 成學과정을 중심으로 분류해보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초학기에는 독학 위주가 되었으며 따라서 그의 학문은 ‘자득’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 진사에 합격하고 남명을 배알하기 전인 31세 경까지는 자득한 학문을 생활에서 몸소 실천하는 것이 위주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관직에 들어가기 전 단계인 이 시기는 그가 지극한 효행을 실천하고 잇달아 닥쳐오던 선고비, 조고비의 상례를 치르면서 배운 바의 예제를 실천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덕계의 학행일치적 실천성은 그가 30대에 접어들면서 남명문도로 진입하게 되면서 강화되었다. 덕계의 실천능력에 대해서는 남명도 인정하였다. 특히 덕계는 남명의 엄정한 출처관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게다가 40대에 접한 퇴계 학문은 덕계로 하여금 정주학의 요체를 얻어 이를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덕계가 「연평문답질의」를 지었다는 것은 그가 이미 퇴계를 만나기 전부터 주자학에 대해 천착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데, 『심경』에 대한 의문을 황준량과 질의한 것은 이러한 성격을 더욱 잘 보여준다.
덕계는 퇴계와 그의 제자로부터는 주자학의 정수를 배우지만 덕계의 ‘庸․學之工’은 퇴계도 인정할 정도로 이미 심화되어 있었다. 퇴계는 덕계의 박실한 성품을 인정하고 더 나아가 『대학』과 『중용』에 대한 높은 수준을 인정해주었다. 퇴계 자신이 덕계를 ‘益友’라고 표현한 것은 그들간의 관계가 相長補益하는 관계임을 역설한 것일 뿐 사제관계로 보고 있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퇴계가 덕계를 만나 자신을 계발해주기를 간절히 원했다는 것을 보건대, 덕계가 퇴계 학통에 입문했다고 보고 그에 의거하여 門徒로서의 성격을 강조하는 것은 당시의 정황을 간과하고 지나치게 퇴계 문인적 성격을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덕계와 퇴계와의 관계는 엄밀히 말하자면, 從遊한 관계일 뿐 직접적인 문인이라고 하기는 어렵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덕계가 자신의 간언을 관철시키는 데 퇴계의 지위와 사회적 영향력에 힘입은 바가 적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40대의 덕계는 초반에는 지방에서, 그리고 중반에는 성균관에서 후진을 교육하는 일을 주로 담당하다가 47세에 사간원 정언을 시작으로 청요직을 거치면서 疏箚 등을 통해 자신의 경세론을 펼쳤다. 이때의 활동과 경세사상에 대해서는 후술하겠지만, 단지 관직자로서 볼 때 덕계는 그의 학문 수준에 관품이 상응하지 못하는 불운을 겪었다고 보인다. 더구나 그가 낭관직을 수행하면서 강직한 성품으로 매사를 정도에 의해 처리하려던 시기에 마침 선조가 즉위했으나 군주의 지우를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불운에 대해 덕계는 개의하지 않았고 또 구차하게 관직에 매이려고도 하지 않았다. 성균관에 재직하던 시절 사대부들이 그에게 질정하거나 강토한 서적들이 『주서』, 『역전』, 『심경』, 『근사록』, 『중용』, 『대학』등이었다는 사실은 사대부들이 그의 학문을 인정하였음을 말해준다. 翰苑 수석과 사관에 추천되거나 홍문관 전한에 제수된 것은 이러한 학문적 고명함에 따른 결과이기도 했다. 덕계가 군주에게 활발히 자신의 경세론을 개진한 시기는 주로 48세 사간원 정언으로 있을 때 「請進學納諫」소를 올린 것을 시작으로 하여 51세까지라는 비교적 짧은 시기이다. 52세부터 그가 사망하는 54세까지는 계속하여 관직을 제수받지만 이미 낙향하여 관직에는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고 있었다. 선조 초기에 덕계는 이조정랑의 직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올곧은 성품을 굽히지 않아 다른 사람들과 갈등을 빚게 된다. 공도를 넓히고자 했어도 시류가 그에 부응하지 못할 때에는 떠나는 것이 바른 도라고 보는 출처관에 입각해 있던 그로서는 병을 핑계로 관직을 사양하는 것이 당연했다. 경륜을 펼칠 수 있을 때는 나아가 자신의 충심을 다하고, 펼칠 수 없을 때는 물러나는 것이 덕계가 보는 의리사상이요, 그 실천이기 때문이다. 이는 사상적으로는 현실정치에서 도학적 이상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군주의 성학을 진보시켜 군주로 하여금 통치의 大體를 잡아가는 것이 더 근본적이라고 여기고 있던 평소의 소견이 좌절됨으로써 초래된 결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의 경세사상은 어떠한지를 구체적으로 고찰해보기로 한다.

3. 經世思想

1) 聖學根本主義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통치란 성인의 도를 정치사회에서 실천함으로써 인민을 교화시키는 것이라고 인식되었고, 이는 통치의 최고 목표로 설정되어왔다. 그런데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통치자인 군주가 덕의 완전한 체현자가 되어야 한다. 이에 군주의 학문 즉 聖學이 문제되었고, 성학의 내용은 도덕주의적 경향을 띠어왔다. 덕계도 이러한 시대사조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었던 인물 중의 한사람이다. 그리하여 그의 경세사상을 전개하는 데 무엇보다 군주의 성학을 강조하였다. 그가 『중용』과 『대학』을 그토록 많이 정독한 것도 『대학』 팔조목의 수신과 치국의 논리를 『중용』의 도와 결부시켜 이를 군주로 하여금 구현하고자 해서였을 것이다. 덕계는 당시 사대부들이 인식하듯이 군주란 그 자체가 보통사람과는 다른 차별적인 존재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덕계는 朱子가 제왕의 학문은 韋布의 학문과는 다르다고 한 데 동의하여 제왕의 일이 필부와 다르듯이, 제왕인 군주의 학문도 ‘布衣之學’과는 다른 차원에서 습득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군주의 학문은 서민의 학문과는 다르지만 학문의 도란 근본적으로는 신분에 따라 그 내용이 다른 것은 아니다. 그러면 학문의 도란 무엇이며 학문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학문의 도란 다른 것이 아니라 ‘거경’과 ‘궁리’일 뿐이다. 덕계에 의하면, 독서하여 의리를 밝히고 고금의 인물에 대해 그 시비를 분별하며 사물에 접하여 그 마땅한지의 여부를 재단하는 일, 이러한 것은 ‘窮理’의 일이다. 그러나 ‘거경’은 이와는 다르다. 先儒들이 ‘主一無適’, ‘整齊嚴肅’, ‘一物도 私意를 용납하지 않는다’고 한 것들은 ‘居敬’의 공과 관련된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이 ‘거경’과 ‘궁리’는 본원의 함양에는 어느 한가지도 결여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며 그것은 나아가 치란과 흥망의 분기점이 되는 것이었다. 덕계가 보기에, 군주의 학문은 이 ‘거경궁리’를 어떻게 하는가가 바로 치란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정주학을 숭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거경궁리’의 공이 없다면 결국에는 요순의 도가 펼쳐지지 못한다고 보았다. 이에 실패한 대표적인 자를 덕계는 송나라의 理宗으로 보았다. 이는 말하자면 정주학이 숭상되고 있던 조선의 현실을 송나라에 비겨 비판하고자 하는 덕계의 숨은 의도의 표출인 듯하다. 당시 정주학 즉 성리학에 대한 존숭도와 학문적 진보는 날로 심화되어 갔지만, 선조의 성학은 진보하지 못하고 따라서 군주의 학문이 치국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덕계는 선조에게 통치자로서 일종의 목표 대상과 경계 대상을 제공해주고 있는 것인데, 그 대상은 주로 堯舜과 이종이다. 요순이 準的이 되는 모델이라면, 송의 이종은 경계로 삼아야 할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요순의 도란 다름아니라 ‘精一執中’에 불과하다. 그리고 ‘精’은 ‘궁리’요, ‘一’은 ‘거경’이다. 그리하여 ‘정밀하게 살펴’(궁리) 形氣의 私가 섞이지 못하게 하고, ‘한결같이 지켜’(거경) 의리가 바르게 한다면, 다시말해 ‘道心’이 마음의 주인이 되고 ‘人心’이 이를 따르게 한다면 모든 행동에 잘못되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덕계가 보기에 이종은 理學을 숭상했음에도 불구하고, 삼왕오제의 心法을 전하는 데는 실패한 인물이다. 이는 선을 좋아하는 마음만 있을 뿐 실제로 그 선을 즐기려는 실상이 없기 때문에 결국 治化로 증험되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덕계가 보기에 조선은 이종의 실패를 교훈삼아 요순을 목표로 매진해야 한다. 그러므로 군주가 요순같은 성군이 되고자 한다면, 학문에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성학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강조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학문에 힘쓰는 것인가? 이를 덕계는 자신을 낮추는 데서 찾았다. 덕계는 이를 ‘遜志’라고 표현하였다. 그러나 결국 자신을 낮추는 목적은 굽히는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정치적인 효율성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즉 덕계는 ‘遜志’가 ‘納諫’으로 이어질 때 정치적인 효용성이 나타난다고 보았다. 구체적으로는 언론의 자유를 보장해주어 언관들의 직언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군주의 겸손함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公論의 채널을 열어두어 여론을 공정하게 수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군주부터 겸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군주는 학문의 부진을 염려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겸손히 하지 못한 것을 염려해야 하며, 다른 사람들의 말이 제대로 소통되지 못한다고 문책할 것이 아니라, 이 언로가 차단되는 원인이 다름 아니라 군주가 마음을 비우지 못한 데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자신을 질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보자면, 군주의 성학은 바로 학문을 하는 태도와 관련되어 있다. 그런데 이 태도는 ‘誠敬’으로 연관된다. 군주가 자신을 낮춰 ‘舍己從人’한다고 하는 것은 입으로만 외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敬’으로 자신의 마음을 곧게 하고, ‘誠’으로 이를 충실히 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성학은 다시 ‘거경궁리’와 연관되는 순환적인 논리 구조를 지니고 있다. 결국 ‘遜志’는 ‘誠敬’으로 직결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점에서 성학은 근본적으로 ‘심학적’이다. 조선 후기에는 군주의 ‘遜志’적 성격에 더하여 ‘建極’적 특성 즉 통치주체로서의 성격이 강조되었다고 한다면, 덕계가 살았던 중기에는 군주의 ‘虛心’한 성격 즉 신료의 간언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從諫’적 자세가 일차적으로 요구되던 시기였다고 생각된다. 덕계가 보기에 군주가 儒臣을 접하여 치도의 강구에 여념이 없는 것은 근본을 알기 때문에 나오는 행동이지만, 치도의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이를 보다 적극적으로 실행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公議를 널리 받아들이고 간사한 이들을 물리쳐 신하들의 충언을 수용하는 태도를 보이는 이른바 개방적인 자세이다. 이러한 실천이 군주에 의해 실행되지 않는다면 ‘好學’군주로서의 실상이 없는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덕계가 보는 참된 성학이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덕계는 부열이 고종에게 진언한 말을 인용하여, 군주가 진정으로 從諫을 잘 한다면 그런 자는 성인이 될 수도 있다고 하였다. 순이나 우임금, 탕왕, 문왕, 주공같은 자들이 성인이 된 것도 결국에는 간언을 수용하고 자신의 과실을 바로잡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사실 군주에게 성학론을 진언하면서 사심을 없애고 직언을 수용할 것을 주장한 것은 어느 시대나, 누구나 주장해왔던 일이다. 그러나 덕계가 ‘종간’을 우선적으로 중시했다는 사실은 덕계가 보는 정치현실이 군주가 ‘신하의 말을 잘 듣는 일’이 무엇보다 절실하다고 인식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주자가 제왕의 학문이 보통사람의 학문과 달라야 한다고 한 것도 말하자면, 경륜을 펴는 근본적인 節目은 같아야 하지만 군주는 다른 사람과 달리 정책 실행에 기민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즉 실질적인 정책을 펴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인데, 덕계는 이를 위해서는 그때그때의 황황에 맞게 현안문제를 해결해야〔時敏〕한다고 보았다.
이상의 덕계의 논리대로 하자면, 통치란 통치자의 심성에만 의존할 수 없고 ‘遜志’와 ‘時敏’이라는 두가지에 모두 의존해야 하며 국가는 결국 이들 능력에 의해 좌우된다. 따라서 ‘손지’와 ‘시민’, 이것은 덕계 군주론의 두 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손지’는 군주 자신의 심법과 관련된 것이라고 한다면, ‘시민’은 군주의 행정 능력과 관련된 것이라고 하겠다.
학문의 도를 궁구해야 한다는 사실 그 자체는 당위적이기 때문에 군주나 백성을 불문하고 똑같이 적용된다. 그러나 어떤 내용을 습득할 것인가, 특히 역사적인 교훈으로부터 어느 것을 취사선택해서 배울 것인가는 신분에 따라 차이가 있다. 위에서 언급했던 제왕학으로서의 특성 때문이다. 군주의 사심을 경계하는 이유도 그가 私人이 아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인의 사심도 천리와 인욕의 경계사이에서 경계해야 할 것인데, 제왕의 사심은 그가 大本을 세워야 하는 입장에 있으므로 더욱 경계되어야 한다. 이에 덕계는 군주성학론을 公私관념에 입각하여 전개하게 된다. 그의 공사관념에 의하면 天理에 순일하고 박잡한 人僞가 없는 것을 公이라 할 수 있으며 그래야만 私에 가려지지 않는다고 본다. 그런데 이 관념대로라면 私라는 것은 公에 의해 구속성을 지니는 것일 뿐, ‘私’ 그 자체에 대한 관념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덕계는 군주가 공부를 세밀히 하여 公私의 경계를 잘 살필 수 있는 능력을 지녀야만 ‘中和’를 이루어 천지만물을 올바르게 화육하는 공을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다시말해 군주에게 공사의 분간 능력을 부여해주는 것이 바로 학문이라고 본 것이다. 공사의 분별 능력이 있다면 군주가 公論을 무시하고 사심에 기울어 상벌을 전횡한다거나 관직을 마음대로 주는 폐단은 없어질 것이라는 기대에서 덕계는 군주의 성학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던 것이다. 군주는 이러한 군주로서의 자격요건을 충족할 때에만 신하에게 事君의 도리가 성립한다. 이 점에서 덕계의 군신관도 대부분의 조선주자학자와 마찬가지로 어디까지나 조건부적인 충성관에 입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논리가 정당화될 수 있는 근거는 다름아니라 ‘天’에 두어졌다. 따라서 인간은 天의 뜻을 따라 그 올바름을 순응하며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주공같은 성인이 기도하며 天命을 청한 이유도 天理는 어기거나 거역할 수 없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덕계는 거스르기 어려운 것이 ‘天’이지만 마찬가지로 회피할 수 있는 것도 天이라고 봄으로써 인간의 자율권에 대한 가능성을 아주 폐하지는 않았다. 天의 ‘不可逆性’과 ‘可避性’, 이 양자는 인간으로 하여금 학문에의 진보 가능성을 기대하게 했던 것이며, 이에 대한 기대 때문에 덕계를 포함한 조선의 신료들은 군주의 면학을 그토록 부단히 권장했던 것이다.
덕계는 제왕의 차별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군주론을 개진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제왕으로 하여금 책무의 위중함을 자각하고 동시에 그 실천을 촉구하고자 해서이다. 그리하여 덕계는 효에 대해서도 제왕의 효를 ‘大孝’라 하여 차별화하였다. 부드러운 소리로 낮춰 말하며 여러 번 간하되 어기지 않는 것은 보통사람의 효라면, 제왕의 효는 宮禁을 정비하여 종사를 안정되게 보존하는 것이라고 함으로써 제왕의 효를 서민의 효와 구분하였다. 제왕의 대효의 실천은 궁극적으로는 그것이 일신의 부모를 위한 효가 아니라 국가를 위한 것으로 확대된다는 데서 의미가 부여된다. 그런데 군주의 개인적인 행동이 개인 영역을 넘어설 수 있기 위해서는 군주가 私의 경계를 초월하여 公의 영역에로 진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언로가 넓혀지지 않고 論思의 직책이 중해지지 않는 원인도 알고 보면 군주가 사심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덕계는 상벌의 시행에서 군주가 보여주는 불공정함은 군주권의 남용이라고 보아 그 오용과 남용을 경계하였다. 상벌을 시행하는 일은 군주만이 할 수 있는 고유 권한이고 커다란 권력이다. 이를 올바로 행사하는 것은 특히 집권 초기에 더 중요하다. 그러므로 이 권한은 신중하게 행사하되 中道에 맞아야 하며 사심이 개재되거나 참람되게 행사되어서도 안된다. 이 권한이 올바로 행사될 때 군주는 군주된 도를 다할 수 있는 것인데, 이 점에서 군주권은 그 자체가 ‘공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2) 예제와 사회질서, 그리고 공론정치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제왕이 서민과 달라야 하는 차별성은 학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상례에 있어서도, 효에 있어서도 달라야 했다. 즉 모든 행동 규범과 의전에로 확대되었고, 나아가 그것은 국가적 전례에서 군주를 비롯한 왕가의 가법이 확립될 때 국가적 질서가 바로잡힌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이에 왕가 가법의 효용성은 왕가의 영역을 넘어 전 국가적으로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덕계도 국가적 질서의 확립이란 무엇보다도 효제를 위시한 삼강오륜의 질서가 바로잡혀 있어야 성립된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서는 禮制가 확립되어 있어야 한다고 보았는데, 주자가례가 아직 전국적으로 시행되기 전이지만, 덕계는 자신의 복상에서 家禮를 준수하고자 했다. 신사정이 戚里로서 불효를 저지른 데 대해 징계할 것을 무려 7번이나 논계한 것도 강상질서를 바로잡는 것이 국가질서를 바로잡는 근간이이라고 사고한 데 기인한다. 아버지가 비록 아들에게 자애롭지 못해도 아들은 아비를 소송하거나 고발하는 무상함을 범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역설한 덕계는 ‘家無二尊, 黨無逆父’한 사회를 질서잡힌 사회로 보았다. 이는 아버지 申檥의 불충죄와 아들 신사정의 불효죄를 구분하여 보는 데서 성립한다. 나아가 이러한 사고는 一家의 효를 잃으면 결국에는 事君의 忠을 기대할 수가 없다는 것으로 이어져 있었으므로, 그에게 ‘효’와 ‘충’은 일직선상에 두어져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만민을 규핵하는 형벌 가운데 제일 먼저 이루어지는 것이 불효에 대한 형벌이며, 가장 중한 죄가 불효죄였다. 덕계는 신사정이 범한 죄를 ‘通天之罪’라 했다. 인간에게 불변의 강상은 부자와 군신, 부부의 관계윤리라고 본 덕계는 제왕이 지켜야 하며 祖宗이 크게 드러내고 계승해야 할 것도 다름아닌 이 ‘綱常’이라고 보았다. 강상 윤리를 유지할 수 있다면 국가가 쇠약해지더라도 복을 기약할 수 있지만, ‘天常’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富强한 나라일지라도 그 부강은 지속되지 못한다고 보았다. 척리의 불효죄를 척결하기 위해 국가와 강상윤리관계를 장황하게 설명한 감이 없지 않지만, 이러한 설명은 강상이 국가 유지의 근간임을 강조하기 위해 덧붙인 것으로 보인다. 덕계의 집요한 계사로 인해 신사정은 그 죄를 논열하게 되는데, 덕계는 윤허를 받게 된 뒤에도 군주가 ‘不和’라는 용어를 잘못 사용했다고 지적함으로써 한편으로는 바른 말을 하고자 하는 그의 강직한 성품을 여실히 드러내었다. 덕계에 의하면 ‘불화’란 어디까지나 대등한 관계에서 사용할 수 있는 용어이지 부자관계에서 쓸 수 있는 용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사정 부자간의 일은 ‘불화’가 아니라 ‘불효’라고 써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질서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典禮의 확립이 우선되어야 하는데, 국가 전례로는 혼례와 상례가 대표적이다. 이에 국혼은 왕가의 차원에서뿐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중요한 전례였다. 혼례의 중요성은 굳이 거론할 것도 없지만, 덕계의 사고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국가적 차원의 혼례는 상민의 차원과는 다르게 거행되어야 한다고 보는 차별적 사고이다. 구체적으로 언급하자면, 중매인 없이 혼례를 치르는 일은 治道에 방해가 될 뿐더러 귀천의 신분적 차별성을 희석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千乘의 나라로서 마땅한 배우자를 구하지 않고 容儀의 아름다움만 취하는 것은 선왕들이 예를 만든 뜻에도 어긋날 뿐 아니라 常經에도 괴리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덕계에 의하면 국가적 질서의 확립은 우선 군주의 齊家로부터 시작된다. “천하의 근본은 나라에 있으나 나라의 근본은 집안에 있다. 그러므로 人主가 齊家를 잘한다면 천하는 모두 잘 다스려진다.” 그러므로 통치를 잘하고자 하는 성현이라면 당연히 제가에 힘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齊家란 어떤 상태를 이르는가. 그것은 우선 남녀와 부부의 구별이 엄격한 상태, 嫡妻와 첩의 구분이 정해진 상태를 이른다. 유덕자가 등용되며 아첨하는 자는 경계하고 기능인이 소외되는 것도 제가된 상태이다. 또한 집안에서 한 말은 밖으로 나가지 않고 바깥일이 집안에 들여지지 않는 상태이며 뇌물과 청탁이 행해지지 않는 상태가 바로 제가된 상태이다. 덕계가 말하는 제가는 궁궐안의 제가에 한정되지 않고 사회 전체로 확대될 수 있는 것이다. 군주의 家法이 확대되면 사람들이 일식처럼 보고 고칠 수 있기 때문에 곧 청명한 치국상태로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제왕의 가법은 곧 제왕가의 경계를 넘어서게 되는 것이다.
덕계가 보기에, 궁중의 제가를 위한 일차적인 해결책은 궁중 질서를 동요시키는 세력의 제거인데, 이를 위해 척리는 물론이고 궁중인과 권간과의 결탁도 경계해야 할 대상이었다. 이들의 폐해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역시 公論을 따르고 선왕의 뜻을 계승하는 것이었다. 즉 모든 질서를 바로잡는 방법은 공론정치에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군주가 치국을 하는 데 믿을 것은 오로지 공론뿐이라고 함으로써 공론을 따르는 것이 治化를 이루는 지름길로 보였던 것인데 상벌을 공정히 하는 것은 이를 위한 하나의 방법이 된다.
그렇다면 공론이란 무엇인가. 이는 다름 아니라 사람들〔國人〕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으로서 國人이 모두 반대한다면 그것이 바로 공론이라고 보았다. 국인의 의견 즉 다수의 의사에서 공론을 구할 수 있는 근거는 한 인간의 지혜에는 한계가 있을 수 있지만 다수는 이러한 한계를 극복할 수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 국인의 범주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포함했는가 하는 문제는 있지만, 덕계는 공론의 대변자를 온나라 사람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그런데 온나라 사람이란 유교에서는 보통 ‘民’으로 현현된다. 그리고 民은 天과 연결됨으로써 통치의 정당성은 民으로부터 그 근거를 제시받는다.
다시말하면, 유교사상에서는 통치의 정당성의 근거를 주로 ‘天’ 내지 ‘天命’에 두어왔는데, 이때 천은 순수히 그 자체로 명하는 것이 아니라 민의 의사를 대신하여 명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天-民-命의 관계가 성립된다. 또한 天과 사람은 같은 이치〔天人一理也〕이다. 이 때문에 제왕은 자기 개인의 견해를 고집할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의논에 자문을 구해야 했다. 여러 사람의 의논을 따른다는 것은 바로 인심을 따르는 것이며 公을 순일하게 하는 것이다. 理가 있으면 命이 있는 법인데, 天은 인간과 함께하지 않은 적이 없고, 인간 역시 天으로부터 명을 받지 않은 적이 없으므로 인간이 옳지 않다고 여긴다면 그러한 인간의 의사가 바로 ‘天意’라는 논리가 된다. 따라서 덕계에 의하면 天道가 바로 人心이므로 인심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 국가를 다스리는 방법이 된다. 전통적으로 유가 사상의 민관은 愚民觀인데 덕계는 백성을 天과 동일시할 수 있는 근거를 ‘小民至愚而神’에서 구하였다. 이는 백성을 개별 인자가 아닌 집합적으로 파악할 때에야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덕계는 이러한 논리에 의해 군주는 小民의 의사인 공론을 따라야 한다는 논리를 펼쳤던 것이다.
그런데 덕계는 공론이 國人의 의사라고 하면서 한편으로는 公論을 불러들여 시비를 분변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대간의 직책이라고 한다. 또한 공론을 주관하여 상벌을 시행하는 자는 군주라고 한다. 따라서 위에서 공론의 대변자를 국인이라 했지만, 사실은 국인은 제한된 통로를 통해서만 공론을 밝힐 수 있을 뿐이고, 또 이렇게 해서 결집된 공론에 대해 재단하고 평가를 내릴 수 있는 자는 대간과 군주 등 특수한 신분에 한정되었다. 그러므로 공론이라 하면 그것은 보통은 조정의 공론을 이르는 것이지 사실 모든 백성에게 개방된 것은 아닌 것이다. 덕계가 계속해서 신사정의 일을 ‘공론’에 가탁하여 거론한 것도 사실은 대신과 군주사이에 전개된 공론에 대한 논박이었을 뿐이다.

3) 직분관

유교의 名分論에 충실한 덕계로서는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는 것이 곧 명분을 바로잡는 데 기여하는 길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덕계는 자신에게 주어진 직분에 철저할 뿐 직권을 남용하거나 태만히 하려 하지 않았다. 그가 이조정랑으로 재직 시에 인재 등용에 구차히 하지 않아 적임자가 아니면 바꾸어버리는 일이 허다했다는 일화는 그가 엄격한 공직자적 사명을 완수하려는 데서 나온 행동이었다. 전랑으로 있을 때에도 당시 참의인 許曄이 동료들과 화합하지 못해 자리를 오래도록 비우자 다른 사람으로 바꾸려 하였다. 동료들이 난색을 보임에도 불구하고 공석으로 오래두어서는 안된다고 판단, 결국 다른 사람을 擬望한 일화가 있다. 어사겸경차관으로 파견되었을 때는 民情을 조사하여 사실대로 보고하려 하였고, 언관으로 있을 때에는 각종 疏箚와 啓辭로 직언하고자 했다. 더구나 자신이 직분을 수행하다 과실이 있게 되면 그것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 댓가를 치르고자 하는 강직함을 보였다.
덕계의 직분론은 자신뿐 아니라 척리, 종친을 포함한 모든 공직자에게 해당되는 윤리였다. 그가 보기에 질서잡힌 사회란 각자가 자기 위치에서 맡은 바 소임을 다하는 것인데, 국가의 기강이 서려면 다른 분야보다 군주의 외척과 종친, 고위관료, 지방관 등이 그들의 직권을 남용하거나 오용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이른바 공직자 윤리내지 기강이 서야 민생이 편안해진다는 것이다. 이에 국가의 체모를 돌보지 않고 사익만 꾀하는 외척이나 가렴주구들은 사회질서를 가장 크게 교란시키는 자들이다. 덕계는 관직자가 사심에 의한 행동을 한다고 판단되면 지위 고하를 불문하고 집요하게 파직을 청하였다.
덕계는 신하로서 관직을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우는 일은 직분에 어긋나는 일일 뿐만 아니라 군주를 무시하는 행위라고 보았다. 덕계는 특히 척리와 권간, 종친, 내시 등 군주의 측근에 있는 자들의 권력 남용이 심한 현실에 대하여 가장 비판적이었는데, 척리가 직권과 척리라는 점을 이용하여 자기가 원하는 대로 근무지 변경을 요청하는 행위 등은 ‘法에도 없는 일이지만 義에도 어긋나는 행위’로 직분을 벗어난 모든 행위들은 私利를 채우기 위한 행위로 보았다. 더구나 군주가 이를 비호해줌으로써 근본적인 해결을 모색하기는커녕 이러한 현실을 묵과하고 방조하는 것은 결국 학문을 정치에 제대로 적용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비판하여 군주의 위정자로서의 모범이 결국 바른 정치의 핵심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덕계는 이러한 폐단을 막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오로지 공론을 흔쾌히 따르는 것’이었다. 덕계가 척리뿐만 아니라 탐관오리들을 비롯하여 관직자들을 비판했던 것은 이들의 폐해가 결국은 國政을 농단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국가를 패망하게 한다고 보아서이다.
중국에 朝聘할 때 문제가 되는 것도 역시 역관을 비롯한 가렴주구하는 무리들이라고 보았다. 이들이 국체를 돌보지 않고 이익만을 도모하는 것은 결국 국가를 지탱해주는 근본이 서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외척으로서 약방제조인 심통원이 외척인 점을 이용하여 이익을 꾀하는 일을 강하게 비판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4) 민생관: ‘權時處中’의 변통 강조

학문을 하되 마음으로 체득하고 그것이 구체적인 현실에서 실천으로 표출될 때 진정한 학문이 된다. 덕계는 학문을 그렇게 보았다. 이는 經綸의 사업이란 章句와는 다른 것이라고 본 주자의 인식과 궤를 같이한 데서 나오는 인식이기도 하다. 따라서 모든 것이 근본과 절목은 같지만 이를 적용할 경우에는 정책적으로 시행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말하자면 책은 책대로 있고, 나는 나대로 따로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조세를 감면해주고 민생을 돌보는 것은 이러한 인식을 실천하는 지극히 기초적인 사업에 해당된다. 백성에게 중요한 것은 공자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식량을 비롯한 기본적인 생활자료이다. 따라서 백성에게 恒産을 마련해주고 부세를 가볍게 해주는 것은 仁政을 목표로 하는 군주라면 누구에게나 중요한 일이다. 조세 부과는 국정을 위해 불가결하지만, 부세와 부역을 균등하게 시행하는 일도 군주로서의 책무이다. 덕계는 군주의 백성에 대한 배려와 시혜를 주장하지만 무조건적인 왕도정치론은 운위한 것은 아니다. 그는 인정을 펼쳐야 한다는 원칙〔常道〕보다는 이러한 원칙을 실제로 시행하게 해주는 細則에 관심을 가졌으며,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현장 조사에 근거하여 정책을 수립하거나 정책을 시의에 맞춰 변통할 줄 아는 융통성 즉 ‘權時處中’과 ‘隨宜通變’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사옹원의 어부와 내수사의 노비들에 대한 선처를 호소했던 것도 이러한 현장조사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들이 공가의 노역을 견디지 못해 도망하는 것임을 알게 되자, 같은 백성으로서 勞逸이 다른 현실을 방치하는 것은 올바른 도가 아니라고 보았다. 민심의 향배가 결국은 부역의 균등한 부과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소외된 자에 대한 배려를 호소한 것인데, 덕계는 更張이란 ‘均齊方正’한 도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하여 경장의 필요성과 부역의 균등을 주장하였다. 당시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던 투탁노비 문제에 대해서는 본래의 주인에게 돌아가게 할 것을 청하면서 군주는 즉위 초기에 疪政을 혁신해야 한다고 함으로써 군주의 개혁의지를 촉구하였다.
일반적으로 현실 문제에 대한 인식은 흔히 자신의 주거지와 주변문제를 중심으로 형성되게 마련이다. 16세기는 훈구와 사림의 정치적 갈등에서 훈구세력은 공신전과 노비를 하사받아 대토지를 확보하고 관권의 비호하에 농민을 불법으로 사역하거나 방납에 관여하여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사림은 이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에서 폐단을 개혁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했지만, 한편으로는 유향소 복립운동과 향약 보급, 서원 건립운동을 통해 사림의 정치세력화를 도모하였다. 이에 사림은 향촌의 중소지주로 상당한 민전을 확보해가면서 이 과정에서 흉년이나 세금으로 몰락하는 농민의 투탁을 통해 혹은 이들의 전답을 헐값으로 사들이거나 노비화함으로써 이익을 도모하고 있었다. 결국 이 과정에서 고통받는 자들은 향촌의 백성들이었다.
덕계가 민생에 대한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진언하는 것은 어사겸경차관으로 지방을 순시할 때 그들의 고통을 실감하면서이다. 영남에 살던 그가 호남지방을 돌아보게 되자 그동안 몰랐던 호남민의 절박한 상황을 체험하게 된다. 이에 흉년이 든 호남지방에 진구책을 시급히 시행할 것을 주장한다. 이때 덕계는 정책 시행에서의 ‘變通’을 강조한다. 즉 정책의 방침이 내년 봄으로 정해졌더라도 상황에 따라 조치해야 한다고 함으로써 정책의 시의성을 중시하였다. 앞에서 말한 ‘權時處中’, 이것은 유가사상에서 그토록 강조하는 이른바 ‘時中’이다. 본래 部曲으로서 성격상 郡이 될 수 없는 진산이 태조의 태실을 봉안했다는 이유만으로 군으로 승격된 뒤의 정상은 처참했다. 덕계는 이곳은 토지가 척박하고 인구도 적은데 貢賦와 徭役을 토질 좋은 다른 군의 예에 의거하여 똑같이 分定하는 것은 공평치 못하다고 여겨 견감해줄 것을 주장하였다.
덕계는 당시 백성들을 곤고하게 하는 정황을 기술하면서 과중한 부세를 견감하거나 불필요한 관리를 줄일 것을 주장하였다. 군액의 과중함에 대해서는, 기병과 보병을 제대로 충족할 수 없는 상황이라 立役할 수 없는 것인데, 이 때문에 공사천 匠人으로부터 차출하여 충당하므로 장인들도 흩어져 버리는 상황이었다. 또한 향리의 숫자를 과다하게 하여 이들을 위한 價布를 민간에 부과하므로 민생의 곤고함은 극에 달했다. 공물 역시 과중하여 백성들은 이를 부담하기 위해서도 동분서주한데 진황지를 개간하게까지 하니 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국가에서는 개간 실적에 따라 給災를 허용하고 있는데, 여전히 예전처럼 징세한다면 급재를 해주어도 소용이 없다. 국가는 농부들이 충분히 起耕할 힘이 있는데도 게을러서 안하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이것도 실상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책 시행에서의 융통성은 진산 뿐 아니라 순천의 돌산도처럼 특수한 경우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가에서는 둔답목장에서 함부로 경작하는 것을 금지하지만, 왜변을 겪고 난 뒤에는 牧子들이 기식할 땅이 없는데 이를 무조건 법대로만 집행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법과 정책 시행에서의 ‘時中’論이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덕계가 제시하는 처방은 현안에 대한 대응책을 제시하는 데 치중하다 보니 대응책이 현장조사에 근거하여 내놓은 것이라는 점에서 현실적이긴 했지만, 그 성격이 개혁적이기 보다는 개선안에 치우친 감이 있다. 덕계가 보기에 민생의 休戚에 방해가 되는 것들은 權奸의 用事, 수령의 탐오, 변방장수들의 侵魚였다. 이 중에서 변방 장수들의 폐해가 더욱 심하다고 보았다. 이들은 武備를 핑계대어 과중한 세를 부과하는데, 덕계는 변장들이 군관과 노마를 두고 첩까지 두고 있으며 군관 역시 첩과 노마를 두고 있는 현실을 비판했다. 이에 군역을 감당하지 못한 백성들은 전토를 다 팔아도 감당하지 못하고 중이 되거나 傭乞하는 형편이었다. 덕계는 이러한 정황에서는 복호와 공물, 군액을 견감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할 것을 주장한다. 그것은 국가는 법의 준수를 말하기 이전에 백성으로 하여금 養生할 방법을 제공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국방관에서도 적용되어,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돌산도의 경작을 금지하지만 사실 외적의 침입은 변방의 무비 여하에 달려 있는데 이는 변방민의 생계를 강구해주는 것이 진정한 국방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민생을 곤고하게 하는 것은 이들 뿐만이 아니다. 궁중의 사치도 한 몫을 한다. 궁중의 사치는 그 자체로서도 금지되어야 하지만 그것이 결국에는 궁밖에까지 전파되게 하는 파급력에 있다. 사치란 天災보다 더 큰 폐해를 가져오는 것이므로 경계되어야 한다. 따라서 덕계가 보기에 검약하여 국가 재정을 견실하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군주가 솔선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風化’ 즉 인민을 교화하는 지름길인 것이다.
덕계의 민생관은 모든 것을 常規대로 하느라 폐해를 인순할 것이 아니라 현지 사정을 살펴 그에 맞게 변통할 줄 아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데서 가장 잘 드러난다. 진구책을 실시할 경우라도 災實의 상태는 해마다 다른데 이를 일괄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한 것도 변통론적 사고에서 나왔다. 그는 백성의 능력에 맞추어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 바로 ‘良法 美意’이며 이러한 정책을 시행하는 군주가 진정으로 ‘字牧’의 의를 아는 군주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를 올바로 시행하기 위해서는 군주가 자상하고 통달한 자를 택하여 자목의 임무를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군주의 인재 등용과 배치 능력을 거론하였다. 이렇게 법의 효용성을 변통성에 두게 되면 정규대로 하느라 폐해가 생겨도 이를 인순하는 것이 아니라 ‘權時處中’하게 되며 仁政도 이를 적절히 조화시킬 때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덕계가 맹자의 “정치를 하는 데 善만 가지고는 부족하고, 그렇다고 法만으로 정치가 행해지는 것도 아니다”라는 말을 인용한 것은 정치란 군주의 善政 의지만으로도, 또 법만으로도 안된다는 것을 역설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덕계가 보는 변통론은 제도와 文爲에만 해당되는 것이었다. 그는 제도와 文爲는 때에 맞춰 손익을 해야 하지만, 삼강오상은 禮의 대체이므로 변경하거나 훼손해서는 안된다고 하여 정책론은 通變的 사유에서 논의되고 있지만 통치론은 결국에는 근본주의로 회귀하고 있다. 그 역시 전형적인 조선 주자학의 경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덕계는 경세론을 전개하면서 군주의 時務와 치도에 대한 증험을 중시하고 있는데, 이러한 증험은 결국 하늘이 제공하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그리하여 군주는 ‘天變’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天心’이란 미리 알 수 있는 것이므로 군주는 이를 알기 위해 대비해야 한다. 그 방법은 바로 修身이다. 말하자면 유가에서는 ‘天’을 빙자하여 군주에게 적극적인 수신을 요구해왔던 것이다. 그렇지 못할 때 하늘은 災異로써 군주를 경계시킨다. 그 징후가 재변과 기상의 변화이다. 따라서 군주는 재변과 기상 관측을 통해 자신을 반성하고 이를 통치에 적용해야 한다. 다른 유학자와 마찬가지로 덕계에게도 재변은 군주의 통치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다. 이러한 변고가 발생했을 때 군주가 할 수 있는 일은 朝賀받는 일을 중지하는 것인데, 이러한 방식은 소극적인 대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군주에게 진정한 위기는 이와 같은 天災時變이 아니다. 천재보다 더 근심스런 것은 人心이 상서롭지 못한 것이다. 이로써 본다면 군주의 통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세상 풍속을 변화시키는 일이었다. 군주가 통치의 성공을 인민의 ‘교화’에 두고자 한 것은 이때문이다. 그런데 군주가 인민을 교화하려면 군주부터 수신을 해야 하며 수신은 곧 학문을 닦는 것을 이른다. 따라서 교화의 문제는 다시 군주의 성학문제로 되돌아오는 구조를 지닌다. 조선 왕조내내 군주의 성학을 문제시했던 것은 이러한 정치사상적 특성에 연유하는 것이다.
앞에서 덕계의 경세사상과 실천적 면모에 대해서는 남명도 인정했다고 했는데, 남명은 국가의 대사는 ‘兵’과 ‘食’ 두가지 일이라고 보았다. 남명은 덕계가 계사에서 경제문제를 거론한 것을 보고는 그가 배운 바를 실천하고 있다고 인정하였다. 덕계는 경제문제 중에서도 삼정의 문제, 삼정 가운데서도 軍政 문제를 직시하여 지적하였고, 환정이나 기타 문제에 대한 전반적인 개혁의 필요성까지 제기했던 것은 아니다. 또한 군정 문제라 해도 이를 사회체계 전반의 문제로까지 확대시켜 인지한 것도 아니다. 아마도 삼정의 문란이 후기만큼 극대화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법전과 법제의 문제에서 성문화된 규정을 지역 사회의 사정이나 특수 상황에 대한 고려없이 무분별하게 일률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예의 그 지론으로서 변통론을 역설했는데, 이는 자신이 지방관으로 직접 목격하여 나온 것이었다. 탁상 공론이나 다른 지방관의 보고서를 통한 간접 전달 방식이 아니라 직접적인 견문자로서 진술한 것이기에 그만큼 사실적이었다. 비록 직임이 주로 대간직에 있었고 관료로서의 임기가 짧았기 때문에 군주의 불성실한 태도라든가 언론 자유를 억제하는 데 대한 강한 반론 및 현안에 대한 개선책을 제기한 것이 대부분이고 정책 전반에 걸친 시무책은 찾아보기가 어렵지만, 덕계가 보여준 경세론은 어디까지나 그 자신의 직분 범위 안에서는 철저했다고 할 수 있다.

4. 출처관

흔히 행장이나 연보의 기록이 죽은 자에 대한 관대한 평가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한 인간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각기 다른 논자에 의해 일관되게 기술되어 있다면, 그것은 그 인간의 덕성이 객관적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것의 반증일 것이다. 더구나 이러한 평가가 『실록』과 같은 비교적 엄정한 역사 기록과 일치할 때에는 더욱 그렇다. 따라서 우리는 덕계의 성품 및 성품의 표출로서의 출처관을 이러한 기록들을 통해 추론해볼 수 있다.
덕계에 대한 세인의 평가에서 공통적인 것은 그가 弘毅, 겸손, 강직하고 실천에 독실했다는 점이다. ‘孝順之誠’과 ‘卓絶之行’이 돋보일 정도로 그의 효행은 유명했다. 잇달은 상사에서는 주자가례를 따르려 했고, 관직에 있을 때는 봉록을 형제에게 균분하여 우애를 지키고자 했다. 관직자로서의 덕계는 권한 안에서 治道에 일조하고자 했다. 선조 앞에서 헌납의 자격으로 왕비 간택시의 가법의 중요성과 외척의 환란을 막을 것을 강조했으며 문정왕후와 보우의 권세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하였다. 疏箚를 지을 때는 당시의 금기사항을 꺼리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다했으며, 항상 公義가 있는 것을 따라가며 행동하고자 했다. ‘好學力行’ ‘守死善道者’라는 명망은 그의 이러한 용기있으며 正道를 지키려 했던 프락시스의 결과인지 모른다. 정랑, 좌랑, 언관, 홍문관 전한, 어사 등의 관료로서 그가 보여준 행동은 명예를 숭상해서 나온 행위가 아니라 자기 직분에 충실한 결과로 표출된 실천적 행위였기 때문이다.
그의 인간성은 순실하면서 과단성이 있다고 평가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성품은 그것이 장점이자 동시에 결점이 되기도 한다. 덕계의 강직성과 과감성은 일을 처리하는 데 다른 자들의 원망을 사기가 쉬웠고, 이것은 그로 하여금 결국 자신의 뜻이 더 이상 현실정치에서 실현될 수 없다는 생각을 품게 하였다. 그리고 그의 과단성은 관직 포기에서도 과감하게 하였다. 선조 4년에 사류와 구신간의 권력 다툼이 벌어진 틈을 타 군주의 외척인 정창세가 권세를 잡고자 모해하여 박순, 이후백, 오건 등을 공격하려 하는 일이 있게 되자, 덕계는 이조정랑을 제수받았으나 병을 이유로 사직한다. 그로 하여금 관직에의 미련을 버리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는 선조 5년에 이조정랑으로서 김효원을 천거하게 되면서이다. 이 일로 외척 심의겸에 반대에 직면, 당쟁과 외척 권간의 발호가 심해지는 현실 속에서 덕계는 더 이상 자신의 경세론이 펼쳐질 수 없음을 직감했을 것이다. 계속되는 관직 제수에도 불구하고 그가 병에 핑계대고 나아가지 않은 것은 평소에 품어오던 출처관에서 비롯된 것이다.『실록』에 “오건은 낭관이 되자 仕路를 깨끗이 하여 쌓은 폐단을 바로잡을 목적으로 흑백을 철저히 가려 원망과 비방을 피하지 않았기 때문에 군소배들이 더욱 꺼리고 미워하였다”고 하듯이, 강직한 성품은 그대로 드러났다. 士林을 탄압하려는 시대적 기미를 보고 관직에 구차히 얽매이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승진에도 한계가 있었다. 덕계가 문벌이 낮아 벼슬이 높이 오르지 못했다고 하는 것을 보면, 문벌주의의 폐해는 이미 조선 중기에 사회 문제가 되어 있었던 듯하나 덕계는 이에도 구애되지 않을 정도로 확고한 출처관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덕계는 문과에 합격하기는 했지만 38세라는 늦은 나이였다. 그리고 그는 수학과정에서 거의 독학에 의존하여 뚜렷한 사승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자연히 학통에 얽매이는 점도 미약했다. 이러한 문벌과 학통으로부터의 탈구속성이 어찌보면 출처에 있어서도 그를 자유롭게 하였는지 모른다. 노진이 “그대가 초야에서 출세하여 현달했으니 그대에게는 과분한 일이다”고 한 것을 보면, 아마 덕계는 과거 출신자이면서도 초야의 지식인처럼 인식되고 그에 상응하는 대우를 받지 못한 것같다. 그는 청요직을 거쳤으면서도 결국 당상관에는 오르지 못하였다. 公道를 넓히고자 했으나 세속과 타협하려 하지 않는 성품, 그리고 士類를 싫어하는 군주때문에) 더 이상의 현달은 용납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남명의 제자 중에 최영경은 처사로 일관한 자로, 곽재우는 의병적 실천가로 그리고 오건은 학행일치적 실천지향을 지닌 자로 분류되곤 한다. 각각 걸어간 길은 다르지만 모두가 上達보다는 하학과 실천을 중시하던 스승 남명의 영향을 받은 자들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덕계는 스승 남명과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남명이 時弊에 대한 구제 불가성을 인식하여 거의 체념에 가까운 자포자기를 하고 소극적인 처세를 하였으면서도 출사욕을 끝내 포기하지 못한 채 현실에 대한 애정과 집착을 보여주어 ‘역설적 세계관’을 보여주었다고 한다면, 덕계는 스승보다 더 철저히 사상과 행동의 일치를 추구한 학자관료였다는 점이다. 그에게 경세사상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이 ‘時中’이었다고 한다면, 이 ‘시중’은 출처에서도 그 근간이 되었다. 세상의 기미를 보고 미련없이 물러난 것은 결국 그 자신이 그토록 힘써 수학한 ‘중용’의 도를 완성하고자 한 최고의 실천이자, 동시에 그 자체가 ‘시중’적 처신이었던 것이다.

5. 결 론

덕계 역시 조선주자학이 통치이데올로기로서 강고하게 자리잡기 시작하는 와중을 살다간 사상가였다. 남명과 퇴계, 양대 도학자가 살았던 접점에 함께 살았던 덕계는 그들의 도학적 경향과 실천적 경향을 함께 수용하게 되면서 학문의 지평을 넓혀가고 동시에 활동영역도 확대하였다. 학통으로는 남명 문인에 가까우면서도 학문적으로는 퇴계 성리학에 경도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어느 한편에 치우치지 않고 양인의 학풍을 모두 자유롭게 섭취하려 하였다. 이것이 가능한 데는 그가 사승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경계인으로 살다간 특성에 연유하는 측면도 없지 않을 것이다.
유학은 기본적으로 ‘수기치인’의 학문이다. 덕계 역시 ‘수기치인’의 충실한 계승자이자 실천가였다. 따라서 그의 학문과 경세사상 역시 이러한 유학의 경계를 벗어나 독자적인 체계를 세우려 하기 보다는 동시대인과 마찬가지의 현실 인식과 처방을 공유하려 하였다. ‘성의정심’으로 인욕을 억제하고 그것이 公道로 직결될 수 있도록 실천해가는 과정이 유교사상임을 숙지하고 있던 그로서는 사상적 경향이 이질적인 두 도학자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오히려 철저하게 유학의 본령을 익히고 실천하려 했던 것이다.
덕계의 경세론은 남명과 남명학파가 정권의 정통성을 문제삼고, 현실 정치의 비리와 공물의 폐해를 비판하고 서리망국론을 제기한 데 비해, 덕계는 통치 주체로서 군주의 성학, 왕가 가법과 전례의 확립에 따른 사회질서의 수립, 그리고 부세 견감과 사회문제에 대한 변통적 처방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가 정책 시행에서의 ‘변통’을 중시했다 할지라도 그것이 지니는 상황주의적 한계는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즉 제도 자체가 지니고 있는 한계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덕계는 민생을 곤고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보다 근본적인 대책으로서 恒産을 마련해주고 부정부패를 척결하는 것이 중요하며, 무엇보다 이를 실행할 수 있는 군주의 역량이 중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다만 덕계는 그의 생존 당시 시급한 사회문제로 제기된 문제들의 치유에 그의 언관으로서의 역량을 우선적으로 발휘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기에 대부분 개선책을 제시하는 데 머물렀던 것으로 여겨진다.
덕계는 붕당간 불화가 본격화하기 이전에 살았던 인물인만큼 남명과 퇴계 양 학파간의 학문적․인적 교류에서 가교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미 심화되어가고 있는 조선 사회의 문벌주의적 경향에 직면하여 그 역량을 발휘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또한 정치적 견해를 펼 때 반대에 직면하게 되면 타협과 절충을 외면하는 강직함 때문에 자신의 응원군을 얻는 데도 실패하였다. 여기에 그가 남명과 퇴계 사후 생존한 기간이 짧았던 점도 그로 하여금 가교자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하였고, 그의 학문도 후학에게 길게 전승되지 못하게 한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이는 조선 유학사상사를 위해서도 안타까운 일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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