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書畵 雲谷 姜張遠

 

 
작성일 : 05-08-15 11:17
德溪 吳健과 道學의 이해/이범직
 글쓴이 : 운곡
조회 : 2,281  
德溪 吳健과 道學의 이해


李 範 稷
(건국대 교수)





1. 머리말

유교 이념을 바탕으로 체제를 정립한 조선왕조는 중종대를 전후하여 사화를 겪으면서 정치사회체제의 변화를 맞이하였다. 이러한 변화의 시기에 德溪 吳健(1521 중종16-1574 선조7)은 근왕의 관료로서 교학분야와 정치 일반에서 중요한 행적을 보이고 있었다. 특히 왕실의 권위를 인정하고 백성의 민생을 돌보아야 한다는 유자로서 입지를 세워 자신이 얻은 학문을 실천하는 학자이자 관료로서 인정을 받고 있었다. 선생의 생애 전반을 돌아보건대 학문의 수양 및 관료로서의 도학적 실천의 면에서 그는 조선의 유자를 대표하는 상징적 삶을 살았다고 하겠다. 선학의 논고에서 이러한 선생의 학문과 행적의 대강은 밝혀지고 있다.
덕계 오건의 생애 전반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선비정신이나 학문적 특징 등은 상당부분 밝혀졌다는 점에서 선현의 삶에 대한 지성사적 접근이 가능하였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가 보여주고 실천하고자 했던 학문적 정치적 지향점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는데 있어서는 일정부분 한계를 갖는다. 조선 중기는 『朱子家禮』나 『小學』 및 四書의 공부 및 실천을 통해 󰡐居敬窮理󰡑를 바탕으로 하는 심성의 수양과 󰡐齊家治國󰡑의 도덕적 개혁이라는 道學이 사림들에게 있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또한 사림의 성장과 함께 尊祖敬宗의 실현무대가 왕실만이 아닌 사대부 일반에까지 적용되는 것으로 인식하면서 宗法의 이해라는 면에 있어 禮學이 등장하는 배경이 되었다.
본고에서는 선생이 살았던 시기를 중심으로 사림의 성장이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그의 가계 및 학맥 그리고 학문의 특징을 먼저 진단하고 다음으로 덕계 오건이 실제 관료생활에서 실현하고자 했던 道學의 내용을 검토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조선중기 사림들의 학문적 성향만이 아니라 이를 어떻게 정치 사회 현실에 조화하고자 하였는가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점을 덕계 선생의 생애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어떻게 진단하고 치유할 것을 고민하였는가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을 어떻게 자리매김을 하고 있었는가를 정리하려는 것이다.

2. 時代的 背景과 家系

조선왕조는 中宗으로부터 仁宗․明宗․宣祖대에 이르는 시대(1506-1607)에 이르러 건국초기에 지향했던 유교이념의 국가체제가 정돈되고 한편으로는 그 자체 모순이 발생하기도 한 시기였다. 조선왕실의 권위가 도전받고 왕실의 정체성에 일대 변혁이 있었다. 즉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를 차지했으며 그리고 연산군의 폐정을 구실로 신료들은 중종반정을 일으켜 왕실의 주인을 교체하였다. 그것은 초기 왕실에 대한 신료들의 정치적 변화를 추구한 사실로 이해되는 것이다. 즉 교체된 왕실의 주인을 통하여 신료들의 새로운 정치이념에 의한 현실 정치세력들의 움직임이 구현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다음 연산군대와 중종대에 일어났던 士禍 즉 戊午․甲子․己卯士禍는 신료들을 포함한 이 시기 사림들의 시대관․정치관․인생관․학문관에 영향을 주고 있었다. 유자들의 시대인식 역사의식에 관에서는 후술하기로 하고 먼저 우리는 중앙정치에 참여하고 있는 이들 신료 대부분이 종사하였던 정치현장에 관하여 조명을 하고자 한다.
왕조재정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던 三政의 체제를 개선해야 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즉 초기 토지제도의 근간이 되었던 수조권 중심의 과전법이 무너져 가고 이에 따른 田政(전세) 운영에서 난관이 노정되고 있었다. 軍政을 중심으로 살펴볼 수 있는 役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있는 한편, 調政 즉 貢物 貢納으로 알려져 있는 현물 납세에서 파생하는 물의는 제도의 개혁을 요구하고 있었다. 삼정의 변화를 중심으로 일어난 사회경제상의 변화는 정상적으로가 아니라 파행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이 파행적 변화는 다시 민생을 포함한 정치권의 변화를 심화시켰다.
관료층은 부정부패로 나타났으며 백성은 민생의 생활고의 심화로 사회기반부터 붕괴되는 국가의 위기로 인식되고 있었다. 이러한 위기에 대한 진단은 적어도 왕조초기이래 성장하였던 유자들의 뜨거운 나라 사랑의 정치의식의 결과였다. 유학을 공부한 지식인 대부분은 정치학으로 과거를 통하여 관료가 되고 정계에 입문하여 중앙정계와 군현의 행정에 참여하면서 현실 정치에 대한 성찰을 하였다.
평소 자신들의 학문에서 입지한 정치적 원칙과 현실에서의 괴리를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 이 시기 유자들의 공통된 과제라고 본다. 기묘사화에서 피화된 趙光祖를 중심으로 도학적 정치개혁을 주도하였던 인물들을 주목할 수 있겠다. 이때 정치 개혁은 실패하였으나 明宗 초 乙巳士禍에서 더 혹독한 사림의 희생을 거치면서 정치적 정도에 대한 유자들의 강열한 希求가 명종 말 선조 초기에 도학적 정치개혁안을 제시하고 있었다.
이때에 제시된 도학적 정치 개혁안은 명종년간에 저질렀던 파행적 정치에서 비롯된 사회적 불안에서 비롯된 임꺽정란과 국외로는 을미왜변으로 알려진 국경 밖으로부터 외적의 침입이라는 국내외의 변수가 심화된 역사현실을 성찰한 다음의 개혁안임을 유의하게 한다.
바로 이때에 덕계는 출생시기로부터 성장기에서 이 모든 역사를 보고 체험하고 학문에 종사하였으며 다른 유자들과 함께 선조초 개혁안을 만들어 선조에게 바치고 있다.
퇴계 이황의 『聖學十圖』 율곡 이이의 『東湖問答』 등은 바로 이시기 유자를 대표하는 두 巨儒의 정치개혁의 구체적 안이다. 퇴계와 율곡의 개혁안의 방향과 내용을 달리하면서 덕계 오건은 請進學納諫疏를 宣祖에게 올리고 있다.
그러면 본격적인 정치개혁안의 내용을 검토하기 앞서 오건선생의 생평을 살펴보기로 한다.
덕계는 중종 16년에 山陰縣 德川里에서 태어났다. 咸陽 吳氏 시조 咸陽府院君 光輝의 12세 손으로 祖父는 軾이며 父는 參奉 世紀이다. 또한 母는 甑山訓導를 지낸 都永康의 都氏이다. 이러한 가문과 가세를 본다면 덕계 선생의 가계는 재지 사림의 일원으로 자임할 만하지만 家勢는 그리 넉넉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선생의 생평을 요약한 『선조수정실록』의 기사를 보도록 하자.

전 홍문관 전한 吳健이 졸하였다. 오건은 어릴 때부터 성품이 단성하고 견고하였는데, 11세에 부친의 상을 당했을 때 이미 효성으로 소문이 났고 장성하여 모친의 상을 만나서는 더욱 禮文에 독실하였다. 집안이 가난하여 학문에 뜻이 있어도 선생을 모시고 배우지 못했는데, 집안에 있는 『中庸』 1권을 수백 번 읽어 音訓이 익숙해진 뒤에 비로소 깊이 사색하며 전심으로 정밀을 기하였다. 그리하여 오래되어 의심나고 모르는 것이 차츰 없어진 다음에야 『大學』․『論語』․『孟子』로 옮겨갔는데, 그때는 공부하기가 매우 쉬웠다. 이에 先生 長者를 찾아가 강론하였는데, 요체가 있었으므로 李滉 이하 숙유들이 모두 그가 정밀하고 깊어 미칠 수 없다고 칭찬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저명해져 현직에 등용되기에 이르렀다. 明廟가 승하하였을 때는 禮服으로 方喪三年을 하고 素食하였으니, 그 독실한 행실이 이와 같았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 사림이 많이 아깝게 여겼으며 반드시 다시 기용하려고 잇따라 侍從職을 제수하였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시골에서 지낸 지 3년 만에 졸하니 나이는 54세였으며, 학도들은 德溪先生이라 불렀다. 그 뒤에 鄕人이 사당을 세워 향사하였다.

『선조수정실록』에 기록되고 있는 덕계선생의 졸기를 통해 우리는 덕계의 가문과 가세가 크게 영달한 집안이 아니지만 덕계는 일찍부터 家學을 통해 학문의 기초를 닦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덕계 선생의 연보와 행장을 참조하여 이 자료의 이해를 돕도록 하면 다음과 같다. 앞에 자료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선대의 문벌은 혁혁하지는 못했으나 유학을 공부함에 도학적 이해와 실천을 겸행하였다. 29세에는 효행으로 復戶되었다는 것으로부터 후술하는 바와 같이 38세에 급제 후 남명선생으로부터 각별히 행도를 권고 받았으며 성균관 학유로 시작한 사환생활은 유자로써 정립된 기상으로 52세에 이조 정랑으로서 벼슬을 버리고 귀향할 때까지 15년간의 사환기간에서 꿋꿋한 조선의 선비의 상을 보이고 있었다.

3. 학맥과 학문의 특징

『덕계문집』 및 『선조수정실록』의 졸기관련 기록에서 우리는 덕계의 구체적인 학자적 처신과 그의 엄정한 주장을 보게 된다.

이조 정랑 吳健이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였다. 오건은 어릴 적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조식을 따라 배우다가 늦게야 과거로 發身하였는데, 문벌이 낮아 벼슬이 높이 오르지 못하였다. 많은 명사들이 그가 어질다는 것을 알고 史官으로 천거하였다. 사관은 으레 시재試才를 거친 자가 하였는데 오건은 취임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묻자, 오건이 말하기를, “내가 괴롭게 스스로 천고 시비의 세계로 들어갈 것이 뭐가 있는가.” 하였다. 6품으로 오른 뒤에 청요직을 지냈고 銓曹의 낭관이 되어서는 公道를 넓히기에 노력하였다. 사람됨이 순실하고 과감하여 어떤 일을 당하면 곧장 앞으로 밀고 나가고 흔들리는 일이 없었으므로 원망하는 자들이 많았다. 盧禛은 오건과 친분이 있었는데, 나무라기를, “그대가 초야에서 출세하여 현달하였으니 그대에게는 과분한 일이다. 따라서 마땅히 뒤로 빠지고 조심해야 할 것인데, 무엇 때문에 섣불리 자신의 소견을 고집하여 많은 사람의 노여움을 자초하는가.” 하였으나, 오건은 그 자세를 마냥 고치지 않았으며 사람들의 노여움은 더 심해갔다. 게다가 주상의 뜻이 士類를 싫어하고 流俗의 형세는 더욱 강해지므로, 오건은 일을 시행할 수 없음을 헤아리고 마침내 벼슬을 버리고 돌아갔다.

앞서 우리는 오건선생이 自得之學으로 경전 공부에 입문하였음을 보았다. 18세에 祖考의 상을 마치고 尺旨山 淨水菴으로 들어가 공부하였으며 21세에는 玉溪 盧楨을 만나 相長의 有益함이 있었다고 연보는 간략하게 기술한 것으로 보아 가학으로 학문에 입문하고 특히 정수암에서

前後十餘年 閉戶危坐凝然不動 晝不變膝 夜不安枕 或低聲讀誦 或靜黙對案 不與寺僧 交一語者 或至數月 時南冥曺先生 藏修於德山洞 先生從之遊 盖有所興 起者大矣 而硏經好學 則自得誠多焉

이라는 기록은 남명선생과의 학연을 주목하게 한다. 31세에 덕계는 進士初試에 합격하고 이듬해 회시에 합격하여 태학 성균관에서 공부하였다. 『덕계문집』과 『남명문집』에는 양선생간에 왕래한 서신과 시문이 사제간의 정리를 표하고 있다.
38세에 大科에 及第할 때까지 연보에는 아무런 기록이 없다. 급제 후 성균관 학유로 임명되고 星州 訓導로 시작한 벼슬은 유자로써 정도를 걷게 한 것 같다. 이때 만난 제자로 기억되는 사람이 寒岡 鄭逑였다. 유학자로 처신을 보강해준 또 한 사람은 바로 星州牧使 黃俊良(號 錦溪)이다. 목사와 교관인 훈도가 志同聲應하여 서로 朱子書를 강론하였다고 특기하고 있다. 황준량은 退溪의 門人이다.
금계 황준량과의 친분을 계기로 퇴계와의 만남이 이뤄졌는데 퇴계와는 43세가 되던 해에 陶山으로 가서 주자서와 『心經』과 『近思錄』에 대해 질의하는 학문적 교감을 갖고 퇴계로부터 庸學之工이 極爲精深하다는 평을 받았다. 朱子의 「延平答問」을 질의한 것이 선생의 문집에 실려져 있음을 본다면 남명문인으로 인식되는 학파적 한계를 넘어 당대 유자들과는 상호 문호를 개방하여 자신의 학문적 성과를 交遊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율곡 이이와도 조정에서 정치적 의견을 논의하고 공감하였던 역사가 있음을 볼 수가 있다.

이때 壼位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는데, 吳健이 아뢰기를, “왕비를 간택하는 데 있어 우선 家法을 보아야 하고 또한 外戚의 환난도 미리 방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임금 자신이 현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외척이 환난을 일으키는 것이다. 참으로 현명하기만 하다면 외척이 어떻게 威福을 일으키겠는가?” 하였다. 이이가 아뢰기를, “전하의 의견이 과연 탁월하십니다. 그러나 임금은 자신의 현명함을 믿고 미리 단속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왕비 간택에 있어서 가법이 어떠한가를 꼭 보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성녀(聖女)를 얻지 못할 뿐더러 후일에 외척이 자행을 부리는 환난이 어찌 없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王莽의 딸인 孝平皇后는 현명하기만 하였으니, 그렇다면 어찌 꼭 父母에게 관계된 것이겠는가?” 하자, 이이가 아뢰기를, “事理를 예사롭게 논하여 常道와 變數의 상황을 따지는 것이라면 성상의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그러나 지금 성상의 배위를 간택하는 데 있어서 부모의 賢否를 묻지 않는 것은 불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모름지기 대신에게 자문하시고 여러 사람의 논의를 널리 채택하시어, 집안 법도가 바르고 부모가 仁賢한 이의 배위를 고르셔야 국가의 복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라는 기록을 볼 때 율곡보다 앞서 오건의 啓箚가 발의되고 이를 율곡이 지지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같은 시기에 조정에서 정치적 공감대를 이루고 있던 저변에는 학문적 유대가 있어 이에 기초한 것으로 보인다. 문집에 있는 내용을 보면, 율곡의 논의와 공감되는 부분을 분명히 찾을 수 있다. 「論國婚非禮疏」에서 덕계는 군자의 도는 부부로부터 새로 시작한다는 『서경』을 인용하고 이어 제왕지사가 匹夫와는 같지 않다고는 하지만 전국의 처자들을 궐하에 운집하게 하여 용의의 미만으로 간취하려는 것은 선왕의 제례의 뜻이라고 볼 수 없다고 비판하고 있었다.
위의 실록의 기록은 이같은 오건의 주장 요점을 율곡이 지지하고 공감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 유자들의 公論的 자세를 읽을 수 있다. 『선조수정실록』에서 오건선생에 대한 평을 인용하여 보면

吳健은 吏曹郞官이 되자 仕路를 깨끗이 하여 쌓인 폐단을 바로잡을 목적으로 흑백을 철저히 가려 원망과 비방을 피하지 않았기 때문에, 군소배들이 더욱 꺼리고 미워하였다.
라고 하였다. 이 평가는 유자로써 당대 사림들이 지향한 실천적 도학자이며 정의와 진리를 구현하려는 고매한 풍모를 지녔다는 분석이 공감이 되는 것이다.

4. 禮治 指向의 改革

오건선생은 유자로써 학문만을 추구하여 이론과 이상을 서술한 것이 아니라 만년에 조정에 관료로써 정책을 입안하고 현장을 답사하면서 민생을 성찰하는 기회를 통하여 얻은 지식을 유교 이념에 기초하여 개혁적 입장을 개진하였다. 덕계는 명종 22년 47세의 나이로 承政院 注書로 임명되면서부터 52세 이조정랑으로 사임하기까지 淸要職을 역임하면서 그의 이상적 개혁안을 上啓하고 있었다.
여기서 잠시 선생의 행장을 인용하여 당시의 관력을 보면 다음과 같다.

隆慶丁卯(1567 명종 22)以後 常綴宗班爲正言者六 禮曹佐郞者四 正郞者一 兵曹佐郞者四 戶曹佐郞者一 工曹佐郞者二 成均眞講者三 司成者一 司諫院獻納者一 司憲府持平者一 弘文館校理者一 副應敎者一 吏曹佐郞者一 正郞者三 議政府檢詳者一 舍人者三

위에 정리한 직책을 보면 덕계는 당시 사림들이 희망했던 淸要의 관직 등만을 주로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청요직은 해당 관원에 대해 학문적 소양만이 아니라 높은 도덕적 礪行을 요구한다. 이러한 청요직을 덕계가 역임할 수 있었던 것은 덕계 자신이 군자로서의 풍모를 갖고 실천하였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덕계는 많은 소임을 감당하였으나 마침내 자신의 개혁안이 용납되지 않자 건강상의 이유를 들면서 관직을 사임하고 南歸하였다. 이 시기에도 누차 조정에서 징소하였으나 병을 칭하고 사양하고 향년 54세를 一期로 終命하였다. 행장에서는

隆慶壬申(1572 선조5) 先生以病謝仕 南歸 構一少軒 引水爲池 池中種蓮 畜魚 塘上栽松 蒔菊頭流之萬疊峰 巒鏡湖之千頃 淸淪起居相接 朝夕管領嘗有詩曰 栽松難待干雲 秀移菊空憐滿手香半夜忽驚思遠夢綠荷池上雨聲長盖 自此爲終老計也 從遊之士 日以坌集 相與講討 於其中 徵書屢降而以病不赴 以掌令召者一 以執義者二 以舍人者三 以典翰者二 (1574 선조7)甲戌七月二十四日 以疾終於家 享年五十四

라고 기술하고 있다.
선생과 조정에서 함께 일하였던 주요한 인물로는 먼저 선조 초 실록에서 六曹 堂上官과 堂下官의 명단을 보면 다음과 같은 인물을 확인 할 수 있다. 이조좌랑은 李珥, 병조정랑 黃允吉, 좌랑은 李廷馣․金孝元과 함께 오건이 좌랑으로 명단에 있다. 이들과 함께 퇴계 이황, 남명 조식, 土亭 李之菡, 고봉 기대승. 등이 朝野에서 왕조의 정치를 주목하고 개혁의 방향을 조절하고 있었다.
선생은 선조 원년 4월 사간원 正言(정6품)으로 請進學納諫疏를 선조에게 올린다. 요지는 이러하다.

신은 저으기 人主의 進學은 반드시 遜志로서 基址로 하고 納諫에는 반드시 虛心으로 根本을 삼는다고 들었습니다. 대체로 뜻이 不遜이면 時敏之功으로 만들 수 없고 마음이 不虛이면 衆善之入을 받을 수 없다. 그 智慧로 움을 自足하고 義理의 오묘함을 능히 探究하여 먼저 私主를 점거하고 능히 天下의 말씀을 용납할 수 있습니다. 이로써 보면 옛 제왕은 내 학문이 진척되지 못함을 근심하지 않고 오직 이 뜻이 不遜 한 것을 근심하고 다른 사람의 말씀이 수용되기 어려운 것을 책망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오직 이 마음의 不虛함을 책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묻기를 좋아하면 여유가 있고 자기를 버리고 다른 사람을 따르는 사람은 어찌 이른바 遜以敏之(공순하고 민첩함) 虛以受之(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임)의 實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그러하나 이는 口耳之爲也(귀로 듣고 입으로 지꺼리는 천박한 학문)가 아니라 반드시 敬以直之하고 誠以實之 하여 無虛假이고 無間斷 후에 이 뜻과 마음을 지니어 능히 천하의 일을 성사 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신이 엎드려 보건데 전하께서는 영예의 자질로서 緝熙의 학에 더 매진함으로써 날로 儒臣들과 만나 寢食에서 조차 여가가 없었다는 것은 治道에서의 聖明은 가히 근본을 안다고 하겠습니다. 公議를 널리 채집하고 奸邪함을 退斥하였으며 일에 따른 기필한 간쟁은 용납된 바 있다고 하겠습니다.…

요지는 임금은 자신의 뜻을 겸손하게 하여 학문에 정진하여야 하며 허심탄회한 마음으로 諫言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같은 내용에 대해 동시기의 유신들은 공감하고 있었던 과제라고 보인다. 다음에 제시되는 바와 같이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우선해야 하는 것이 군주의 정치 이념을 올바른 방향으로 정립하는 것이었다. 명종 21년에 올려지고 있는 사헌부 대사헌 오상 등의 차자를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 학문에 전심하고 政治에 전력하신 지가 이미 20여 년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세월만 보내고 그 치적을 보지 못한 데는 어찌 그만한 까닭이 없겠습니까. 전자에 권간이 당국하고 보도가 잘못되어, 성상의 공부가 蟊賊에게 침해되고 치적이 淸明에 이르지 못하였으며, 대간이 제거되어서는 다시 聖候가 미령하여 경연이 조석에서 폐지되고 학사가 좌우에서 멀어져 조야가 위구해 하고 식견 있는 이가 개탄하였는데, 이제 하늘에 계시는 조종의 가호로 옥체가 강령하여 날마다 신료를 접견하고 경연이 누차 열리니 무릇 혈기있는 사람치고 어느 누가 기뻐 눈을 씻고 태평의 치세를 바라보지 않겠습니까. 오랫동안 鬱結되었던 공론이 확장되려 하고 이미 좌절되었던 사기가 진작되려 하니 이는 바로 전하께서 策勵하고 고취시켜 날로 진작해 가도록 해야 할 시기입니다. 공론이 확장되지 못하고 사기가 진작되지 못하고서 능히 장구한 치안을 유지한다는 말은 예전부터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전하의 한 마음은 만사와 만화의 본원입니다. 만약 한가로이 심신을 쉬거나 사가 없이 사물을 접해야 할 즈음에, 天理가 순수하지 못하고 인욕이 제거되지 못함으로써, 공사와 의리, 시비와 득실의 기관이 각각 분립하여 그 사이에서 교전한다면 아무리 공론을 확장시키고 싶어도 때로는 저지되고 사기를 진작시키고 싶어도 때로는 좌절되는 것입니다. 정치를 방해하는 일들을 어찌 퇴치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시종 학문에 힘쓰는 마음에다가 다시 緝熙의 공력을 더하여 한번 생각하는 사이에도 반드시 삼가고 살피어 천리와 인욕의 즈음을 밝히고 공사와 의리의 한계를 판단하며 조존 성찰하고 확충 제거하여 말하고 동작하는 사이나 용인하고 처사하는 즈음에 이르기까지 한 가지 행사도 공 아님이 없고 한 가지 동작도 의 아님이 없게 하며 스스로 만족해 하지 말아서 이언을 살피고 스스로 아는 체하지 말아서 당론을 받아들이시면, 聖心이 환해지고 中外가 화합해져서 털끝만한 사도 그 사이에 개재하지 못하고 만사와 만화가 전하의 소유로 되어 모두가 뜻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대저 천리와 인욕의 구별은 다만 공사와 의리 사이에 있고, 인군의 학문은 이 두 가지 사이부터 먼저 밝히는 일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혹 이 두 가지 사이에 어두워 그 경중과 선후의 구별을 상실하면 선과 악의 분류가 한쪽은 舜 임금, 한쪽은 盜跖으로 될 것이니,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 두려움을 아셔야 합니다. 근자에 공론이 聖聽에 채택되고 폐정이 차례로 제거되어 가므로, 신민들의 지치를 갈망하는 마음이 바로 이 시기에 있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내가 부덕한 사람으로 신민의 임금이 되어 계속해서 당론을 접하게 되었으니 어찌 가납하지 않겠는가. 다만 일을 처리하는 데는 의당 중도를 얻어야 하고 판결은 의당 위에서 내려야 하며 국사는 안정을 힘써야 하고 소란을 일으켜서는 안 될 것이다. 학문만을 위하여 신기의 미령함을 불고한다면 나의 이 몸이 아무 관계도 되지 않겠지만, 宗社를 위하자면 불가불 신기를 헤아려 視事하게 마련이므로 경연을 오랫동안 폐지했다는 의논을 면하기 어렵게 되었다. 간쟁을 받아들이려고 그 가부를 살피지 않는다면 간쟁을 잘 받아들인다는 이름은 좋을 듯하나, 어찌 능히 말마다 들어 주고 일마다 따라 줄 수가 있겠는가. 또한 내가 어찌 공사와 의리를 알겠는가마는, 법에 규제된 중난한 일은 따를 수 없다. 지금 진산 부수의 일을 신원시키자고 해서 고칠 수 없는 대한의 전례를 고치고, 바꿀 수 없는 案付의 법을 무너뜨리는 것이 옳겠는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절대로 따를 수 없다. 차사는 마땅히 유의하겠다.” 하였다.

인주가 天理를 깨닫고 聖德을 길러 人慾을 제거함으로써 聖學의 도를 넓혀야 한다는 오상과 오건의 차자는 당시의 도학적 배경 속에서 연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명종은 이러한 聖學을 닦아 道學을 실천해야 한다는 사림들의 요구에 대해 적극 수용하지 않았다. 이는 위의 차자에 대한 사신의 평을 통해서는 알 수 있다. 즉 사신은 󰡒대간이 納諫에 대해 차자를 올렸는데, 비답에 이미 간쟁을 듣기 싫어하고 스스로 아는 체하는 기색을 보였다. 조그마한 일에도 쾌히 따르지 않고 있으니, 그렇다면 다시는 태평하고 청명한 치화를 볼 수 없을 것인가󰡓라고 비판하고 있었다. 일견하여 왕실정치의 분위기를 바꾸어 언로를 개방할 것을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 선생은 결론으로

此乃 尙書自用之訓 大易亢龍之戒 非臣之所望 於殿下也 古之帝王 能納諫 而不篤學者 容或有之矣 能篤學而不納諫者絶 未之有也 然則 觀其言路之開閉 而其所學之淺深 盖可想矣 … 先儒氏有言曰 一敬足以敵千邪 一誠足以勝百僞 伏願 殿下留神焉

라고 하여 언로를 열고 닫는 것은 학문의 얕고 깊은 것에 있다고 보면서 학문에서 얻는 한 가지 󰡐敬󰡑은 천 가지 사악함을 대적하고 한 가지 󰡐誠󰡑은 백가지 거짓을 제압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선생은 다시 왕실의 齊家를 촉구하는 상소와 함께 선조의 국혼을 맞아 혼례의 의미를 살피면서 근본에 충실하도록 의견을 개진하고 있다.
司諫院 請齊家疏에서

謹按 宋臣朱熹進言於孝宗曰 天下之本在國 國之本在家 故人主之家齊 則天下無不治 人主之家不齊 則未有能治 其天下者也 是以三代之盛 聖賢之君 能修其政者 莫不本於齊家 盖男正位乎外 女正位乎內 而夫婦之別 嚴者家之齊也 妻齊體於上 妾接齊於下 而嫡妾之分定者 家之齊也 采有德 戒聲色 謹嚴敬遠技能者 家之齊也

라고 하였다. 즉, 朱子의 故事를 인용하여 人主의 家道가 되어 있으면 천하가 다스려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특히 부부의 역할을 분명하게 하는 것이 家齊의 길이라고 하였다. 더 나아가 宣祖의 國婚에 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앞서 정리한 바와 같다.
즉 왕실의 도덕성을 주시하면서 성리학에서의 보편적 윤리를 왕실에서 우선하여 지켜줄 것을 요구하는 것이고 연장선에서 국가 기강의 수범을 선조에게 요구하는 것으로부터 당시 개혁의 시작을 개진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선조의 입장을 성리학적 보편적 논리로서 압박하고 구체적인 방법과 내용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請窮理居敬箚」에서 선생은 앞서 진학의 방법을 좀더 자세하게 개진하고 있다. 문집에서는 세주로 隆慶 戊辰四月21일 朝講 이라고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즉 선조 원년 4월 21일 朝講에서 피력한 箚子인 것이다.

學問의 道는 다름이 아니라 窮理 居敬일 뿐입니다. 선유께서 말씀하시되 혹은 독서하고 義理를 講明하는 것이고 혹은 古今人物를 논하여 그 是非를 변별하는 것이고 혹은 應接事物하여 그 當否를 裁斷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즉 窮理之事인 것입니다. 先儒께서는 主一無敵으로써 말하기도 하고 整齊嚴肅으로써 말하기도 합니다. 항시 법되는 것을 깨닫고 그 마음은 일물도 수렴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居敬의 공덕이라 하겠습니다. 이 두 가지 것은 수레의 두 바퀴와 같은 것이고 새의 두 날개와 같은 것입니다. 그 하나도 빠트려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이는 곧 本源을 涵養하여 爲學하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天下萬事가 所從出이고 治亂興亡이 나뉘어 지는 바입니다. 宋나라 理宗이 程朱學을 숭상한 것은 그 뜻이 不美한 것이 아니나 窮理居敬의 공이 없었고 是非가 不明하고 用舍가 顚倒되어 이때에 당하여 진덕수․위료옹은 군자의 유자이었으나 屛棄되어 不用되었고 史彌遠 賈似道는 小人으로 심했으나 腹心으로 두고 國事를 맡기여 날로 生民愁怨과 兵連禍結하고 疆土日縮하여 數世之後에는 免覆亡之禍를 면할 수 없었습니다. 堯舜之治가 巍巍蕩蕩 卓冠千古한 것을 후세가 가히 미칠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 用力之地를 구하면 다만 精一執中뿐이라고 하겠습니다. 精이라고 하는 것은 즉 窮理를 말하는 것입니다. 一은 즉 居敬의 功입니다. 대체로 形氣로부터 發하는 것을 가르켜 일러 人心이라 하는 것이고 義理에서 발하는 것을 일러 道心이라 합니다. 人心은 難公하나 易私하는 것이므로 危道心 難明而易昧하기 때문에 微한 것이 반드시 그러하니 정밀하게 살펴 形氣의 私가 섞이지 않도록 하여 한 가지 순수한 것으로 지킴으로써 義理之正으로는 使道心으로 하여 항시 주인으로 하면 常爲之主하고 인심으로 여기에 매번 청명케 하면 위험은 안전하게 됩니다. … 殿下께서 만약 크게 하려는 뜻이 있으시면〔如有大有爲之志〕원컨대 요순의 정치를 이상으로 하고 理宗으로써 감계로 삼으소서.

이 차자의 내용을 보면 선조에게 당시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居敬窮理󰡑의 자세부터 정립해야 한다는 유자의 기본 철학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흔들림 없는 굳건한 자세를 정립한 다음 현실의 구체적 사안을 교정할 수 있다는 것을 보인 것이다. 堯舜을 표준으로 하고 宋의 理宗의 역사를 경계의 교훈으로 할 것을 개진하고 있다.
선생은 사상가로서 관념의 세계에서 윤리와 학문의 자세만으로 정책을 투영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 기층사회를 성찰하고 당시대가 안고 있는 정치 사회 경제적 모순과 갈등을 개혁차원에서 안을 제시하고 있었다.
御史兼災傷敬差官時 선생이 올린 啓辭를 보면 호남지역에 농사 현황을 보고하는 것으로 당시 농민들이 감당하는 부세의 실상과 생활상을 여실하게 읽을 수 있다. 농작물의 작황뿐만 아니라 徭役, 各司에 납부하는 貢物의 형태, 貢賦徭役의 불균형에서 오는 폐단과 전세부과에서 災結에 대한 給災, 査定에서의 현실성 없는 조치, 軍役의 폐단으로 騎步兵 戶首 奉足 관리가 원칙에 따르지 않고 公私賤 匠人과 繕工監 司宰監의 其人役이 본래 鄕吏役인 것인데 공정치 못하다는 役 운영을 보고하고 부역의 繁重함과 중앙관청의 침학을 보고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 생활상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그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해결 방안을 제시하였다. 즉,

以臣之妄見言之 諸司所納之物 分明條錄議及大臣十分商確 非郡民所堪者 一切蠲減 刪其煩重 適於地 褊務從簡 約稱其民力 至於陳荒之地 則不拘常規 隨起隨稅 起一畝則 收一畝之稅 起十畝則收十畝之稅 取其新 不徵其舊 永爲恒式 堅如金石 又擇慈詳通達之士 授之字牧之任 照濡撫摩 如保赤子 然後庶幾 勞來還集而 人或願耕於其野矣 不然雖歲貢虛稅 而民益散 地益耗 終有所不忍言之事矣

이 내용의 요지를 정리하면, 먼저 군민이 감당 할 수 없는 것은 일절 견감하고, 둘째 常規에 구애되지 말고 현재 경작하고 있는 전토에 따라 수세하도록 하고, 셋째 자상하고 사리에 통달한 수령으로 백성을 돌보아 경작을 유도할 것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順天의 突山島에 있는 屯畓과 牧場 경영 실태 보고에서도 규제법이 현실성이 없다고 지적하고 그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기층민들의 민생고에 대한 진단은 그가 직접 보고 겪은 후에 나온 이었으며 이에 대한 방안은 학문에서 오는 民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철학의 실천성에서 오는 결과였다. 특히 論逋租逋卒弊瘼啓辭에 이러한 인식이 반영되고 있다.

臣生長南方 目睹民間疾苦 往來之際 連聞弊瘼 民生休戚 自上所當洞知 言雖支離 請一一 啓之 流亡絶戶 貽害於一族 切隣 非一朝一夕 三十年間 權奸用事 守令貪汚 邊將之侵魚 尤有甚焉 各浦所受之物色 如樺皮雉羽 正鐵膠筋 鹿皮等物 托武備徵之 猶可說也 至於到防之時 先捧到防米 又捧牛價之木 生痲白苧木花 白綿子眞油 水油淸蜜黃蠟鹽醬 一應果實 凡諸日用之物無所不取 無名之橫斂 亦已多矣

이 내용에서처럼 덕계 선생은 權奸 貪官汚吏의 苛斂誅求가 백성들을 도탄에 빠지게 하여 백성들이 향리를 떠나 流亡하기 때문에 租稅를 내지 못하고 軍役을 피해 도망하여 누적된 조세와 군역의 폐단이 있게 된 원인이라 보았다. 이를 개선하기위해서는 積年의 逋租를 경감하고 御史를 파견하여 吏道와 紀綱을 바로 해야 한다고 하였다.
국가기강을 세우기 위해서는 왕실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을 주문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請罪申士楨不孝의 啓辭에서는 신사정(中宗의 四女 敬顯公主의 아들)의 불효를 지적하여 7회에 걸쳐 청죄를 한 사실은 왕실이라고 해서 아버지에 대한 불효의 윤리적 책임을 면할 수 없음을 주장한 것이다. 請黜 石尙宮 啓辭는 신사정과 내통한 석상궁을 축출하라는 3회의 장계가 있었다. 그리고 請改正楊仁壽司直 啓辭는 『선조실록』의 기사를 참조하면

楊仁壽의 일에 대하여 양사가 이미 오랫동안 論執하였고 지금 경연에서도 깊이 논계하고 있습니다. 상께서 양인수에게 句讀를 배운 일이 있었다 하여 벼슬로 그의 공을 보답하려고 하시는 것은 비록 공정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에게 동반의 직을 주라고 명하신 것은 사심에 누된 바를 면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대간이 불가한 것을 논계하자 도리어 西班의 높은 직을 주라고 하셨으니, 이러하고도 간언을 따르는 실정이 있다고 이를 수 있겠습니까. ‘덕을 높이고 공을 갚는다.[崇德報功]’는 옛말이 있기는 하지만 공이 크면 크게 보답하고 작으면 작게 보답하는 것으로 경중과 대소가 자연 구분이 있는 것이니 잘못 시행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경중․대소․선후․완급의 순서를 잃는다면 어찌 정치의 체모가 있다고 하겠습니까. 상께서 들어와 大統을 이으시고 지금 상중에 계시므로 대의(大義)에 억눌려 일을 시행할 수 없기 때문에 마땅히 해야 할 일도 시행하지 못하고 계십니다. 큰일도 미처 못 하고 계시면서 하찮은 노고에 보답하기를 생각하신다면 이는 선후의 순서를 잃었다고 이를 만합니다. 軍職을 올려 제수하고 내려 제수하는 것이 별로 경중의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간의 공론을 따르지 않는 것은 곧 정치에 큰 누가 되는 것입니다. 소신의 생각으로는 대소 완급의 일을 차례대로 거행해야 할 것으로 이와 같은 일은 천천히 짐작하여 하는 것이 옳다고 여겨집니다. 중대하고 다급한 국사에 대해서 廟堂의 중신과 가까이 모시는 신하들 사이에 지금 알맞게 처치할 방도를 생각하고 있지만 갑작스레 그 단서를 발론하는 것이 미안스러울 듯하여 현재 계달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상께서 우선 언관들의 논계에 따라 양인수에게 알맞은 직품을 주도록 하시고 대소 완급에 따라서 제대로 처치하여 순서를 잃지 않으신다면 사리에 매우 온당하고 정체政體에도 합당할 것입니다.

라 하여 양인수에 대한 선조의 私恩에 대해 비판하고 이를 선조가 대신 및 언관의 뜻을 받아들여 논의한 뒤 처리하는 것이 올바른 聖君의 도리임을 밝히고 있다. 이를 보더라도 이시기에 신료인 유자들의 군주에 대한 인식의 일단에 선생은 공감하고 계사를 올린 것임을 알 수 있다. 請收內需司奴子 及司饔院漁夫 勿役之命 啓辭에서는

賦役之均 乃王政之一也 公平正大之體 無遠近內外之殊 故雖一傜一役 必均施而不偏 然後民無獨勞之怨 而事有易成之功矣 司饔院漁夫 內需司奴子 亦一王民 而獨逭於公家之役者 何哉 車馬之役在諸役最苦 而不出於此 則必及於彼 同是吾民 而勞逸不同 飛所謂絜矩之道也 先王之所以 更張者 實出於均齊 方正之道 而今日之所以勿役者抑 又何意乎 請亟收勿役之命

라고 하여 왕실 측근인 내수사 奴婢와 사옹원 漁夫에게 부역을 면하는 편향된 시책을 철회하고 민의 부모로써 민과 好惡를 같이 할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請 國婚尙儉 啓辭에서는 국가재정형편이 중종시보다 좋지 않으니 혼수비용을 절감하는 수범을 왕실이 솔선 할 것을 요구하는 등 왕실의 예외 특수한 처지를 인정하지 않고 보편적 질서의 세계를 공유하려는 역사의식을 구현하고 있었다.
다음 『德溪先生文集』에 있는 이러한 현실인식과 그 문제점에 대한 대안을 통해 덕계의 道學적 정치에 대한 이해를 볼 수 있다.

請 林晉 賞加 啓 請罷 尙州判官 尹堅鐵 啓
請收 沈銓 給牒之命 啓
請勿陞級 宗親內官等 啓
請黜 李洪男 啓
請 罷康陵監役官員 啓
請罷刑曹佐郞 鄭琢 啓

위의 계사의 제목에서 시사하는 바 정치 현장에서의 비리에 연루된 인사에 대한 비판과 군주의 바른 조치를 요구하고 있었다.
請罷 兵使 洪彦誠 啓辭는 兵政에 대한 이해의 일단으로 명종 19년 4월 10일(신사)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인사에 대한 오건의 자세를 읽을 수 있다
請 改正 金秀文 崔遠 加資 啓에서는 공론에 따라 포상과 관리들을 감독하여 민생에 도움을 줄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적절히 할 것을 주장한다. 포상이 지나치다는 내용이다.
請 改正 宦寺 賞加 啓辭에서는 선왕의 법이 만세토록 폐단이 없다면 별문제가 없으나 개혁할 것이라면 고쳐야 한다고 하였다.
請 依該曹公事 啓辭에서는 담당 관청에 맡기고 委差之徒의 縱恣無忌하는 猥濫之習을 없애야 한다고 진단하였다.
請 特發御史 啓辭에서는 민폐가 많은 敬差官을 파견하지 말고 御史를 보낼 것을 건의하였다.
自劾 請遆 啓辭는 9월19일 社稷祭 제문을 잘못 만들었다는 자신의 실수를 자핵한 것이다.
請遆 大司憲金貴榮 以下啓辭는 訟事의 공정성을 다루고 있다.
請罷 尹思商 啓辭 에서는 풍천부사인 윤사상에 대한 무능과 탐학정을 비판하고 지방민에 애정을 표시하고 있다.
請罷 司儀金在孚 啓辭에서는 공물 방납의 폐단과 還上시에 貪汚한 관습을 비난하였다.
弘文館請從憲府辨決 啓辭에서는

人君必 以大公至正爲心 然後一政一事 皆出於正 以人心無不服矣 苟或一毫偏私繫累於應物之地 則其何以端本出治 而服一國之人心哉 今者 內需婢 訟田之事 情理甚椧 憲府之辨決 乃所以執法伸寃 則殿下但 當付之有司 罔敢知于玆矣 而至勤 上敎仍屬於賜牌 王者無私之政 果若是乎 所訟之田 傳自父祖 事無可疑 先王判付之 命至再至三 則此固 先王大公至正之美意 而乃以一時之賜牌爲之辭乎

라는 논리로서 王者無私를 들어 憲府의 辨決을 군주가 따르도록 요구하고 있다.
請命 備邊司措置備禦 啓辭에서는 국방에 대한 선생의 견해를 보이고 있다. 국경방어를 위한 현실사건을 들어 水使 鄭亨國과 연계하는 그리고 備禦之策을 備邊司에게 조치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啓辭 전반의 내용은 왕실의 도덕적 정립을 비롯하여 군주의 公平無私할 것을 그리고 민생의 고충과 관료행정의 합리적 운영을 토대로 하는 개혁의 원칙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중기의 변화에 대응하여 덕계 선생은 居敬窮理를 통한 心性의 수양을 바탕으로 道學을 이해하고자 하였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유교의 예치적 정치론을 상기하면서 당대의 유자들과 호흡을 같이하려는 자세를 견지하고 이를 지지하는 유자와 관료가 있었다는 사실이 실록 자료와 문집에서 보이는 것이다.

5. 맺음말

선생이 살았던 조선시대는 유교이념으로 정치가 수행되었던 정치문화가 나름대로 정착되고 이에 따른 부작용 이를테면 역사적 모순도 드러나는 시기였다. 반면에 유교정치 문화가 만든 조선의 유자층은 두터웠으며 독창적인 학자를 배출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시기 대표적인 유자로 퇴계․남명․율곡 등을 기억하고 있다.
선생은 남명의 문인으로 기억되고 있으나 청소년기에는 가학과 독학으로 경전을 읽고 중년에 가서 남명을 만나 가르침을 받은 것이다. 또한 주자서를 공부하는 과정에서 퇴계와의 교유가 있었으며 선생의 학문에 대한 공감대는 율곡을 비롯한 당대의 유자들에게서 얻었다. 이러한 당대의 유자들의 전폭적인 지지위에서 늦게 진출한 정계활동은 청요직을 역임하게 되었다.
굳건한 학문적 기초는 명종말년부터 선조초 모순에 빠진 유교문화에 변화를 요구하는 입장을 기록에서 읽을 수 있었다. 선생의 주장이 수용되어 개선된 부분도 있었으며 선조의 결단이 없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고 있다. 건강이 허락하지 않아 54세를 일기로 하세하여 선생의 학문이 크게 번영하지는 못하였으나 과거에 합격하여 초임하게 된 성주의 훈도로서 교수의 기회는 한강 정구를 학연으로 하고 있다. 일견 선생의 학풍은 한강으로 연계되어 퇴계와 남명의 문하를 겸하게 되었다고 하겠다.
선생의 학문은 유교 경전에 대한 철저한 이해를 궁구하고 체득하여 실천하는 학문의 성향을 보여 주었다. 선생이 깨달은 유교이념에 즉한 治道를 선조에게 진언하였으며 민생을 위하여 철저한 관료 감독과 현실에 대한 성찰을 수행하여 자주 그 개선책을 제안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당시대의 지식인으로 유자로서 의무를 다하려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직 본 연구에서는 본격적으로 분석하지 못하였지만 다음과 같은 면을 지적할 수 있겠다. 덕계선생의 『주자가례』 및 四書에 대한 공부와 실천의 면을 볼 때 조선 중기 예학의 발단으로서 주목되는 바가 있다. 그것은 『주자가례』에 기초하면서 보편적 윤리관 질서관이 강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크게는 사림의 도학적 실천노력의 기초가 되는 심성의 수양〔居敬窮理〕과 이를 통해 수양된 君子의 도덕적 체현의 실체가 보편적으로 인식되어 왕실중심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국가례보다 우선하는 사대부 질서론이 폭넓게 자리잡기 시작했다는 것으로 이러한 변화를 우리는 덕계 선생의 생애와 정치적 여정 속에서 엿볼 수 있다 하겠다. 그것은 성리학에 바탕하는 도학의 심화가 더 나아가서는 사대부의 정치사회적 성장을 바탕으로 하는 사대부중심의 禮學 발전으로 이어지는 면이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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