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書畵 雲谷 姜張遠

 

 
작성일 : 05-01-10 21:00
아함경 이야기4
 글쓴이 : 홈쥔
조회 : 2,276  

아함경 이야기 4

아함경 이야기10
2. 그 사상. 3. 내재하는 방해물

"대덕이시여, 흔히들 '악마, 악마'합니다만, 악마란 무엇입니까?"
"라다여, 만약 색(色)이 있다면 그것이 악마요 방해물이요 교란하
는 것이다. 그러므로 라다여, 색을 악마라 관(觀 ; 깊이 있게 보는
것.)하고, 방해물이라 관하고, 교란하는 것이라 관하고, 병이라 관하
고, 가시라 관하고, 고통이라고 관하라. 그렇게 관하는 것이 바른 관
찰이니라.
라다여, 만약 수(受)가 있다면 그것이 악마요, 방해자요, 교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라다여, 수를 악마라 관하고, 방해자라 관하고, 교
란하는 것이라 관하고, 병이라 관하고, 가시라 관하고, 고통이라 관
하라. 그렇게 관하는 것이 바른 관찰이니라."
([相應部經典] 23:1 魔. 漢譯同本, [雜阿含經] 6:10 魔)
상응부경전 마 한역동본 잡아함경 마

전장(前章)에서도 비슷한 무답 형식의 일절을 인용했다. 우파바나라
는 제자가 '현생적인 법'에 대해 물었고, 붓다는 여러 보기를 들어가며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여기서도 라다(羅陀)라는 제자가 비슷한 형식
의 질문을 제기했던 것이다.
이 제자는 매우 솔직한 젊은이였던 것 같아서, 어떤 기본적인 뻔한
사실에 대해서도 자기가 납득할 수 없는 경우는 부끄러움도 모르고 어
김없이 물은 듯 보인다. 이를테면 흔히들 '무상, 무상' 하지만 무상이
란 대체 무엇이냐고 묻기도 했다. 또 흔히 '고(苦)'를 말하지만 고란
무엇이냐 라든지, '무아, 무아'라고 하는 그 무아는 대체 무엇이냐고
묻는 식이었다. 그런 문답이 [상응부 경전]속에서는 한 곳에 모아져
'라다 상응(相應)'이라는 일련의 경군(經群)을 이루고 있거니와, 그것
은 우리에게 더 없이 소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왜냐 하면 거기에서 이 솔직한 젊은이는 무릇 불교의 기본적인 개념
에 대해 샅샅이 묻고 있을 뿐 아니라, 붓다는 붓다대로 매우 명쾌한 답
변을 하고 있으므로, 오늘 우리가 붓다는 대체 어떤 뜻으로 무상이니,
고니, 무아니 하는 말을 썼는가를 알아보려고 할 때, 이 '라다 상응'의
여러 경이야말로 가장 명쾌한 대답을 제공해 주는 까닭이다. 나 역시
무엇인가 불교의 기본적인 개념에 대해 의문이 생겼을 경우에는 언제나
이 경전을 들추어 보고 있다.
그런데 앞에 인용한 부분은 그런 라다와 붓다의 문답 가운데 하나이
다. 여기서 라다가 물은 것은 악마란 대체 무엇이냐는 문제이다. 그런
질문 자체가 이미 악마를 객체적인 존재로 보고 있지 않다는 뜻이 될지
도 모르겠으나, 아니나 다를까 붓다는 이른바 색(色), 수(受), 상(想)
, 행(行), 식(識)의 작용이야말로 악마의 정체라고 대답하고 있는 것이
다.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붓다는 인간을 관찰하고 인간을 논할때면,
먼저 인간을 다섯 부분으로 분석하였다. 오온(五蘊)이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오온은 매우 어려운 말이거니와 결국은 다섯 부분이라는 뜻
이다. 그리고 그 다섯 부분이 바로 앞에 열거한 색, 수, 상, 행, 식이
다. 이제 그 다섯 부분에 대해서 대강 설명을 한다면 색이라는 것은 인
간의 육체, 즉 물리적인 요소를 가리키고, 수 이하의 네 가지는 그 정
신적인 요소를 가리킨다. 즉 수는 감각이요, 상은 표상(表象)이요, 행
은 의지요, 식은 판단 이성의 작용이다. 결국 붓다는 이 다섯개의 개념
이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정체를 나타내는 것이라 보고, 이제 라다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악마란 그런 요소들이 작용해서 생기는 내재적인 방
해물이요, 내재적인 교란자요, 내재적인 불안이요, 내재적인 가시라고
말한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없지 않다.
많은 고대 문헌에 자주 악마가 나오지만, 그런 경우 대개 악마를 비인
간적인 존재로서 묘사하고 있는 것 같다. 불교 문헌에서조차 후대의 것
은 역시 그런 태도를 취하였다. 그러나 붓다와 그 제자들에게는 악마란
필경 단순한 비유에 불과하였다. 결국 악마라는 낡은 개념을 빌려 인간
의 내적 방해물이나 불안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땅히 주의
해 두어야 할 일로 생각된다.
또 다른 보기를 들어 보자면 [상응부경전] 22:63 '취(取)'라는 제목
의 경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와 있다.

"색(色)에 집착할 때는 악마에게 붙잡힌다. 집착하지 않는다면 악
마로부터 풀려난다."

그리고 여기서도 또한 수, 상, 행, 식의 넷에 대해서 같은 표현을 하
고 있거니와, 그 말투로 보아 인간 밖에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악마가
아니라, 인간 안에 도사리고 있는 나쁜 생각을 가리킨다는 것은 명백하
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을 깨닫게 된 다음부터 나는 이제껏 별로 주의하지 않았던 아함
부의 여러 경에 산재해 있는 악마 이야기를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읽어
갔다. 읽어 감에 따라 그것들이 실로 중대한 뜻을 지닌 문헌임을 알게
되어, 지금까지 모르고 지냈던 일을 뉘우치기조차 하였다. 왜냐하면 그
런 이야기 속에는 붓다와 그 제자들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는 몇 가지
의 중요한 실마리가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를테
면 [상응부 경전] 4 '악마 상응(相應)'이라 불리는 것은 악마 이야기를
다룬 스물 다섯 가지의 경을 수록하고 있거니와, 그 첫째 경인 '고업
(苦業)'이라는 부분에는 이런 내용이 실려 있다.
그것은 붓다가 정각을 성취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절, 아직도 네
란자라 강 기슭의 어떤 보리수 밑에서 명상에 잠겨 있던 때의 일이다.
그때 붓다는 마음속으로 먼저 자기가 고행을 포기했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순간 마라(악마)는 붓다의 심중을 눈치채고 게(偈)를 가지
고 도전해 왔다.

고행을 떠나지 않아야만이
사람의 마음은 청정해짐을
그대는 이것을 버린 주제에
청정한 양 자처함 우습구나야.

붓다는 그것이 마라의 소리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도 또한 게를 가
지고 대답했다.

불사(不死) 위해 고행을 닦은 나머지
전혀 이익 없음을 깨달았노라.
육지에 놓여진 삿대와 같아
오직 무익한 줄을 마땅히 알라.

그러자 악마는 "세존은 나를 알고 있다. 내 정체를 간파하고 있다."
고 외치면서 허둥지둥 그림자를 감추었다고 한다.
대체 경전 편집자들은 이런 데에 왜 이런 이야기를 적어 넣었던 것일
까? 생각건대 앞에서도 강조했듯이 고행의 포기는 붓다로서도 매우 곤
란하고 중대한 행위였음에 틀림없다. 정각 직후에 그가 아직도 그것에
대해 얼마쯤 불안을 느끼는 순간이 있었다고 해서, 조금도 이상할 것은
없는 줄로 안다. 그런 내심의 불안이 악마 이야기의 형식으로 여기에
표현되었다고 추측하는 것은 아무 무리도 없는 일이겠다.
더 명백하게 이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것은 같은 '악마 상응'의 스
물 넷째 경(經)인 '칠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그것 또한 정각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여전히 보리수 밑에서 명상하고 있던
붓다에게 갑자기 악마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 왔다.

불사, 안온(安穩)에 이르는 길을
네가 진정 깨달았다면
그 길을 너 홀로 감이 좋도다.
어이 남에게까지 설하려는가.

그것은 틀림없이 정각 직후, 붓다가 설법 여부를 문제삼고 있던 때의
일이었을 것이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그 문제에 대해 붓다의 마음은
한때 부정 쪽으로 기울었다. 왜냐 하면 붓다는 그것에 대해 여러 가지
위구와 불안을 느낀 까닭이다. 이런 부정적 일면을 문학적으로 나타낸
것이 이 악마 이야기인 것이며, 그런 주저를 극복하고 마침내 설법을
결심하게 된 과정을 묘사한 것은 앞에 든 '범천 권청'의 이야기인 것이
다. 즉 붓다의 심리적인 움직임이 두 측면에서 묘사됨으로써 하나는 악
마 이야기가 되고, 하나는 범천 이야기가 되고 있으니, 그것들은 매우
흥미 있는 고대 문학의 표현 형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악마 이야기는 붓다가 최초의 설법에 성공하고 마침내 60명에
이르는 제자들을 전도 여행에 떠나 보낼 때 다시 나타나게 된다. 그들
을 보냄에 즈음하여 붓다는 "비구들아, 자, 전도를 떠나라, 많은 사람
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라고 격려한 끝에 여러 가지 주의를 주었
다. 우리는 그것을 붓다의 '전도 선언'이라고 부른다. 그것에 대해서는
앞에서 상세히 언급한 바 있거니와, 그 '전도 선언'이 있은 직후, 마라
(악마)의 소리는 다시 붓다에게 속삭였다. [상응부 경정] 4:5 '계제(係
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우스워라, 그대는 이 세상에서
악한 이의 올가미에 걸리고 말았도다.
그대는 악마의 사슬에 매였나니
사문이여, 그대는 자유를 잃었도다.

이에 붓다도 게를 설하여 대답했다.

나는 진정 이 세상에서
악한 이의 올가미를 벗어났도다.
나는 악마의 사슬을 풀어 버렸거니
파괴자여, 그대는 패하였도다.

생각건대 이제 설법을 결심했다는 것은 다시 또 자기 생애에 중대한
의무를 부과했다는 것이 된다. 모든 구속에서 가까스로 해탈한 지금,
그것은 또 하나의 속박이 되지 않으랴. 이런 새로운 불안이 붓다의 머
리를 스치고 지나갔다고 해서 조금도 이상할 것은 없으리라. 이 악마
이야기는 이런 불안의 상징적인 표현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대승 불교가 전하는 악마 이야기
(붓다와 관계되는)와 이 아함부에 나타난 악마 이야기는 그시기 설정이
매우 다르게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대승에서는 그것을 모두 붓다의 성
도(成道) 이전의 일이라고 기록했으며, 정각 이후의 붓다는 완전히 악
마의 시련으로부터 벗어난 것으로 여기고 있다. 즉 붓다의 인간성이 아
함부의 여러 경전과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파악되고 있는 것이다. 말하
자면 붓다가 이미 인간보다 훨씬 높은 절대자로서 인식되어, 그 인간성
은 아주 희박해진 느낌이 없지 않다. 그러기에 정각 이후의 붓다와 악
마를 관련시킨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아함부에 보이는 악마 이야기는 주로 정각 이후의 붓다에 관
련되어 있다. 앞에 든 세 개의 설화가 다 그렇거니와, 그 밖의 것들도
예외가 거의 없다. 하기야 정각 이전의 붓다에게야말로 더 많은 심중의
불안과 고민이 있었을 터이고, 따라서 악마 이야기의 형식으로 표현해
야 될 많은 소재가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아함부의 여러경전
들은 주로 정각 이후의 언행과 사상에 초점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
리고 아함부의 이런 이야기는 바로 붓다 그분의 풍부한 인간성의 표현
이 되므로, 우리에게는 매우 귀중한 자료라고 아니할 수 없는 바이다.
이런 악마 이야기를 통해서 보면 붓다도 때로는 식욕의 유혹을 받기
도 했도, 어떤 때는 수면의 유혹과도 싸워야 했던 모양이다. 다쳐서 누
워 계셨을 당시에는 - 붓다의 만년에 데바다타(提婆達多)가 반역했을
때 - 무엇인가 불안을 느낀 적도 있었던 것 같다. 또는 여러 사람들을
상대로 법을 설하다가, 갑자기 이래서 될까 하는 불안을 느낀 적도 여
러 번 있었던 모양이다. '악마 상응'의 14 '적절'이라는 이름으로 불리
는 경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이렇게 나는 들었다. 어느 시절 세존께서는 코사라 국 에카사라(一
葦)라는 바라문 마을에 계셨다. 거기서도 역시 세존께서는 많은 재가
신도들을 상대로 법을 설하셨다. 그때 악한 이 마라는 이렇게 생각했
다.
"지금 사문 고타마는 대중에게 에워싸여 설법을 하고 있는 중이다.
어디 내가 가서 여러 사람을 속여 줄까?"
그래서 악한 이 마라는 세존 앞에 나타나 게를 가지고 말을 걸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법을 설함은
현명한 그대의 할 일 아니니
그대여, 그 짓을 굳이 하여서
탐심과 노여움에 매이지 말라.

세존은 그것에 대답하셨다.

남의 이익과 동정을 위해
깨달은 사람은 가르치나니
탐심과 노여움을 여래는 진정
이미 모두모두 해탈했노라.

그때 악한 이 마라는 "세존은 나를 알고 있다. 나를 간파하고 있
다."고 하면서 괴로워하고 의기 소침해서 자취를 감추었다.

나는 이 경전이 전하는 붓다의 설법자로서의 태도를 매우 좋다고 생
각한다. 이것 역시 악마 이야기의 형식으로 표현되었으니까, 우리는 그
표현을 넘어서 붓다의 심중을 살필 필요가 있으려니와, 여기에서 발견
되는 붓다의 설법태도는 다른 종교인들의 그것과는 썩 다른면이 있는
듯하다. 그것은 거칠게 부르짖는 예언자의 태도가 아니다. 지나친 자신
감으로 무반성하게 엮어 세우는 설교 태도 또한 아니다. 자기는 과연
이 사람들에게 설법할 자격이 있겠는가, 그것에 정말 어울리겠는가, 또
는 탐심이나 노여움에 사로잡히는 일은 없겠는가, 이런 인간다운 불안
이나 반성이 마음에 오고 간다는 것은 도리어 남을 가르치는 사람이라
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조건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붓다야마로 그런 설
법자였음을 이 이야기가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아함경이야기 " 제 2 장 그 사상. 4. 연기(緣起)."는
다음회로 이어집니다.

아함경 이야기11
2. 그 사상. 4. 연기(緣起)

이것 있음에 말미암아(緣) 저것이 있고
이것 생김에 말미암아 저것이 생긴다.
이것 없음에 말미암아 저것이 없고
이것 멸함에 말미암아 저것이 멸한다.
([相應部經典] 12:21:19)
상응부경전

이제까지 나는 10장에 걸쳐 붓다라고 불리는 사람을 여러 측면에서
관찰하고, 또 사상의 성격에 대해서도 몇 개의 특징을 든 바 있거니와,
한 마디로 말하여 붓다는 여느 종교가의 유형과는 썩 다른 인물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어찌 보면 종교가라는 개념보다는 오히려 사상가 또는
철학자의 범주에 속했던 것으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그 인품을 말한대
도 그렇지만 사상은 더욱 그렇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하늘로부터
받은 계시 따위와는 전혀 달라서 정연한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기
에 그 가르침을 파고들면 들수록 우리는 그것이 지혜의 가르침인 점에
깊은 인상을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 사상 체계의 뼈대를 이루는 것이 이른바 '연기의 원리'이다. 그것
은 이미 말했듯이 보리수 밑에서의 정각의 내용일시 분명하다. 정각이
니 깨달음이니 하는 것은 바로 이 연기의 원리를 파악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후의 모든 사상적 전개는 최초의 설법의 내용이된
'사제'의 가르침을 비롯해서 모두 이 원리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이 없
을터이다. 따라서 붓다의 사상을 파악하고자 할 때, 먼저 이 연기 사상
을 명확히 이해할 것이 요청되기 마련이다. 이것이 붓다의 사상을 파고
드는 정공법인 것이다. 그러나 이 원리를 파악하기란 그리 수월치가 않
다. 이미 언급했거니와 붓다가 이 법을 설할 것인가 어쩔 것인가 하고
주저했던 이유도 바로 이 점에 있었던 것이다. [상응부 경전] 6:1 '권
청'은 그것에 대해 이런 말을 기록해 놓고 있다.

"내가 체득한 이 법은 심히 깊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다. 적
연미묘하여 사람들의 생각을 초월하며, 심원하여 오직 지혜로운 이만
이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욕망을 즐기고, 욕망에 빠지고, 욕망을 좋아
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연기 즉 모든 존재는 원인이 있음으로 말
미암아 생겼다는 이치를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것을 잘 살펴보건대 연기설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로 두 가지 점
이 지적되고 있다. 그 첫째 이유는 심히 깊다든지, 적연 미묘하다든지,
또는 오직 지혜로운 이만이 능히 알 수 있다든지 한 것이 그것이다. 그
리고 그 둘째 이유는 세상 사람들은 욕망을 즐기고 욕망에 빠지고 욕망
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되어 있다. 이제 이 두 가지 이유를 검토할 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게 된다.
먼저 첫째 이유로 말한 '사상이 심히 깊다'함은 어떤 사실을 가리키
는 것일까? 후대의 불교 문헌에서도 우리는 흔히 '심심(深甚)'이니
'미묘'니 '난견(難見)'이니 하는 어휘에 부닥치게 되거니와, 불교 사상
이 미묘해서 파악하기 어렵다는 것은 어떤 뜻에서 하는 말일까? 현대
인들도 불교를 이해하려 들다가 그것이 너무 난해함을 탓하는 수가 많
다. 그리고 그 난해한 이유는 대개 엄청난 술어 때문이라고 하는 소리
를 듣는다. 그러나 정각 직후의 붓다에게는 아직 한 개의 술어도 없었
을 것임에 틀림없다. 지금 우리가 문제삼고 있는 '연기'라는 술어마저
도 틀림없이 후일에 성립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가 난
해하다고 한 것은 결국 그것이 추상적인 원리였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인도인들이 추상적인 사고를 즐기던 민족임은 문헌을 통해서
잘 알수 있으나 아직 붓다 시대에는 추상적 사색이 발달해 있지 않았던
것이다. 몇몇 사상가들이나 그들을 따르는 사람 중에는 충분히 그것을
감당해 내는 이도 있기는 하였으나, 여느 사람들에게까지 그것을 바란
다는 것은 무리였다. 이 연기의 원리는 아주 추상적 원리인 까닭에 도
저히 여느 사람들의 이해를 기대하기 어려웠던 것이겠다. "적연미요"하
다든지 "사람들의 생각을 초월한 것"이라든지, 또는 "지혜로운 사람만
이 능히 알 수 있다."든지 한 것은 이런 사실을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먼 후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미 추상적인 사색에
익숙해져 있으므로, 이 첫째 이유가 우리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하
여도 좋을 줄 안다.
그 둘째 이유로서는 세상 사람들의 생활 태도가 지적되어 있다. 사람
이란 흔히 그 도리가 진리임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자기 비위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같은 경의
다른 대목에서 "이는 세상의 조류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붓다가 말씀한
것도 이런 사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여진다. 뒤에서 밝혀지겠지만 이
연기의 원리가 요구하는 실천이란 욕심을 떠나는 문제, 즉 고의 멸진을
실행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욕망에 빠져 있을
때에는 아무리 연기의 도리를 설해 보았자 도저히 그들에의해 받아들여
질 가능성은 없다고 하여야 될 것이다. 이리하여 "나는 오직 기진 맥진
할 따름이리라."는 이유가 붓다로 하여금 설법을 주저케 만들었던 것이
다 . 이 점에서는 현대에 사는 우리라 해서 조금도 고대인 보다 나아진
것은 없을 터이다. 우리 또한 욕망을 즐기고, 욕망에 빠지고,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아니 고대인보다 훨씬 욕망에 민감한 것이 우리
이며, 욕망 이외의 것은 알려고도 들지 않는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
이다. 이런 태도를 그대로 지녀서는 아무리 불교를 알려고 애쓴다 하더
라도 결국은 인연 없는 중생이 되고 말 것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왜
냐 하면 실천 없는 불교란 존재할 수 없는 까닭이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나는 짐짓 연기 사상의 난해함을 강조하고 있는
듯이 보일지 모르나 사실은 그와 정반대이다. 하기야 붓다도 그리고 후
세의 불교인들도 자주 그것의 난해함을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내가 힘
주어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것은 이미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을 알리기 위해 나는 붓다가 열거한 난해의 이유를 나누어서 설명
했던 것이다. 그 첫째 이유, 즉 심심 미묘하기 때문이라는 것은 추상적
인 사고에 익숙해진 우리에게는 이미 해당되지 않는다고 보아도 된다.
문제는 오히려 둘째 이유에 있다.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느냐 하는 점
이다.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이다. 도리는 잘 알겠으나 자
신은 그것에 의해 살아갈 뜻이 없다고 한다면, 결국 불교와는 인연이
끊어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선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 것인가? 그 실마리가 될까
해서 나는 이 장(章)의 첫머리에 '연기의 공식'이라고도 할 수 있는 몇
구절을 인용해 놓았다. 그것은 붓다가 정각한 직후, 아직도 보리수 밑
에서 명상하고 있을 때에 정리해 둔 것이다. 사실을 말한다면 나도 역
시 붓다가 정각을 성취한 그 순간의 소식에서부터 해명해 가고 싶지만,
그것은 누구의 손으로도 불가능할 것임이 틀림없다. 그것은 마치 뉴턴
이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 인력의 법칙을 깨달은 그 순간 같
은 것이어서, 그때의 내적 체험의 경위는 아마 본인으로서도 밝힐 수가
없었으리라 믿어진다. 따라서 경전에도 그 순간의 내적 체험을 이야기
한 붓다의 말씀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우리는 오직 그런 체험에 입각
하여 정리해 놓은 사상 체계를 통해서 어느 정도 그것을 짐작하는 수밖
에 도리가 없는 것이겠다.
그런 뜻에서 우선 이 '연기의 공식'을 취택한 것이고 이것은 두 부분
으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이것 있음에 말미암아 저것이 있고, 이것 생김에 말미암아 저것이
생긴다."

는 부분이다. 붓다는 일체 존재의 발생을 이 공식으로써 풀어 간 것임
에 틀림없다. 이를테면 그 보리수 밑에 있었을 때, 붓다는 자기의 과제
와 대결하면서

"무슨 까닭에 노사(老死)가 있는가? 무엇으로 말미암아 노사가 있
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했다고 한다([상응부 경전]12:10). 이미 그런 사고
방식이 연기의 원리에 입각한 것이려니와, 여기에서는 존재의 발생을
문제삼고 있는 것이니 "말미암아(緣) 생긴다."는 말을 줄여서 '연생(緣
生)의 공식'이라 해도 좋을 줄로 생각한다.
또 하나의 부분은 그 후반의 것으로 다음 같은 말로 되어 있다.

"이것 없음에 말미암아 저것이 없고, 이것 멸함에 말미암아 저것이
멸한다."

붓다 자신이 이 공식을 사용한 보기를 살피건대, 역시 보리수 밑의
명상에서

"무엇 없는 까닭에 노사(老死)가 없는가? 무엇이 멸함으로 말미암
아 노사가 멸하는가?"

를 생각했다고 한다. 이것 또한 연기설에 의한 사고법이며, 여기서도
"말미암아(緣) 멸한다."는 말을 줄여서 '연멸(緣滅)의 공식'이라고 해
도 좋을 것으로 안다. 이리하여 이 전반과 후반을 합친다면 '연생, 연
멸의 공식'이 되겠으나, 그것을 다시 줄여서 나는 '연기의 공식'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그리고 연기의 공식이란 결국 이런 공식에 의해 모든
존재의 발생과 소멸을 생각해 가는 일임에 틀림없다.
여기에서 다시 한걸음 나아가, 더 직접적으로 연기의 원리가 붓다에
의해 어떻게 설해졌는지를 생각할 때,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상
응부 경전] 12:20 '연(緣)'이라는 제목의 경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더
없이 귀중한 자료라고 생각된다. 왜냐 하면 연기란 무엇인지에 대해 붓
다가 직접 정면에서 이야기한 경전은 아함부의 여러 경 중에서도 이것
밖에 없는 까닭이다.
그것은 붓다가 사바티(舍衛城)의 교외에 있는 제타(祇陀) 숲의정사
즉 기원 정사에 계시던 때의 일이거니와, 붓다는 자진해서 비구들에게
"오늘은 연생의 법에 대해 설하고자 한다."고 말문을 떼었던 것이다.
비구들은 필시 긴장한 표정으로 붓다의 다음 말씀을 기다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때 붓다가 설하신 말씀을 경전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비구들아, 연기란 무엇인가? 비구들아, 생(生)이 있는 것으로 말
미암아 노사(老死)가 있느니라. 이 사실은 내가 세상에 나오든 안 나
오든 법으로서 확정되어 있는 바이다. 그것은 상의성(相依性)이다.
나는 이를 깨닫고 이를 이해하였다. 이를 깨닫고 이를 이해하였기에
이를 가르치고, 선포하고, 설명하고, 나타내고, 명백히 하여, '너희
는 마땅히 보라.'고 말하는 것이니라."

이 설명 속에는 세 가지 중요한 사항이 포함되어 있다. 그 하나는 연
기의 성격에 대한 언급이다. 그것은 계시도 아니고 영감도 아니며, 더
구나 붓다가 발명한 도리일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붓다의 존재 여부와
는 관계없이 예로부터 이제까지 엄연히 정해져 있는 법칙이라는 것이
다. 그것은 이 원리가 본래 존재 사실 자체임을 말하는 것이겠다. 그런
뜻을 다른 곳에서 붓다는 '오래 된 기(古道)'에 비유해서 그것이 원래
부터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씀한 적도 있다.([상응부 경전] 12:65 성읍)
그러면 그것에 대해서 붓다는 어떤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이
둘째 사항인바, 붓다는 그것을 깨닫고 그것을 이해함으로써 가르치고,
선포하고, 설명하는 구실을 맡고 있는 데 지나지 않는다고 되어 있다.
'오래 된길'의 비유를 가지고 말한다면 붓다는 다만 그 오래 된 길을
발견하여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그 길을 정비하여서 사람들로 하
여금 가게 할 뿐이라는 뜻이 될 것이다.
그리고 셋째 것은 이 원리의 구조에 관한 사항이다. 이것이야말로 지
금 우리가 알고 싶은 당면 문제이거니와, 이에 대해 두 군데에서 언급
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 하나는 "생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노사
가 있다."는 구절이다. 이는 연기설의 구체적인 보기라고 해도 좋겠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것은 상의성"이라고 한 구절이다. 극히 짧은 말이
기는 하나, 그것이야말로 이 원리의 구조를 표현한 소중한 자료라고 하
지 않을 수 없겠다.
'연기'라는 말이 "말미암아 일어난다."는 뜻임은 이미 언급했다. 이
것을 팔리 어의 원어에서 따져 보아도 역시 Paticcasamuppada, 즉 '조
건에 말미암은 발생'이라는 뜻이 된다. 일체의 존재는 모두가 그럴 만
한 조건이 있어서 생겨났다는 것, 홀연히 또는 우연히 또는 조건 없이
존재하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 이것이 연기 사상의 내
용이다. 또 그것을 뒤집어서 말한다면 일체의 존재는 그것을 성립시킨
조건이 없어질 때 그 존재 또한 없어져 버린다는것, 따라서 독립, 영원
하여 불변하는 것이란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 이것이
연기 사상이다. 그것을 하나의 원리로 추상화 시킨다면 '조건에 의한
발생'이요, 그것을 약간 현대식으로 말하면 '관계성'이 될 것이며, 과
거의 불교인들은 흔히 이것을 '인과성'이라고 했거니와, 이제 붓다는
그것을 '상의성'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말했듯이 고대인 중에는 그런 추상적인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붓다의 제자들도 그 예외는 아니
었던지, 한 경전([상응부 경전] 12:67 노속)에 의하면 코티카라는 제자
도 그것이 아무리 해도 이해되지 않아서 친구인 사리푸타에게 물은 적
이 있다고 한다.

"사라푸타여, 그것은 대체 어떻게 이해하여야 되겠는가?"

그것에 대답하면서 사리푸타는 한 비유를 들어 다음과 같이 설명했
다.

"친구여, 이를테면 여기에 갈대 단이 있다고 하자. 그 갈대 단은
서로 의지하고 있을 때는 서 있을 수가 있다. 그것과 같이 이것이 있
음으로써 그것이 있는 것이며, 그것이 있기 때문에 이것이 있는 것이
다. 그러나 만약 두 단의 갈대에서 어느 하나를 치운다면 다른 갈대
단도 역시 넘어져야 할 것이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이것이 없으면 그
것도 없는 것이며, 그것이 없고 보면 이것 또한 있지 못하는 것이
다."

현대인은 그들보다 훨씬 추상적인 이해에 뛰어나다고 보아야겠으나,
그래도 연기의 원리가 잘 이해되지 않는 분이 있다면 이 비유를 곰곰이
생각해 주시기 바란다.

아함경이야기의 (2. 그 사상. 5. 이는 고(苦)이다.)는 다음회에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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