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書畵 雲谷 姜張遠

 

 
작성일 : 05-01-10 21:02
아함경 이야기5
 글쓴이 : 홈쥔
조회 : 2,317  

아함경 이야기 5

아함경 이야기12
2. 그 사상. 5. 이는 고(苦)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고의 성제(聖諦)이다. 마땅히 알라. 생(生)은
고이다. 노(老)는 고이다. 병은 고이다. 죽음은 고이다. 미운 사람과
만나는 것도 고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도 고요, 욕심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고이다. 통틀어 말한다면 이 인생은 바로 고
그것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고의 발생의 성제이다. 마땅히 알라. 후유(後
有)를 일으키고, 기쁨과 탐심을 수반하며, 이르는 곳마다 그것에 집
착하는 갈애(渴愛)가 그것이다. 그것에는 욕애(欲愛)와 유애(有愛)와
무유애(無有愛)가 있다."

([相應部經典] 56:11 如來所說]. 漢譯同本, [雜阿含經] 15:17 轉法輪)
상응부경전 여래소세 한역동본 잡아함경 전법륜

전장(前章)에서 나는 연기의 원리에 대해 누누이 설명한 바 있거니와
, 아마도 무미 건조하게 느껴져서 그런 이야기가 인생을 더 나아지게
하는데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생각했던 분도 있을 는지 모르겠다. 그러
나 붓다는 그 원리를 깨달은 순간 '이젠 됐다.'고 생각했을 것임에 틀
림 없다. 하기야 '이젠 됐다.'는 따위의 점잖지 못한 말을 입 밖에 내
지는 않았을 테지만, 붓다는 그것에 의해 인생의 모든 과제를 풀 수 있
는 열쇠를 발견하게 된 것이므로 매우 기뻐했을 것은 사실이겠다.
그러면 대체 어떻게 하여 연기의 원리가 인생의 수수께끼를 풀어 헤
치는 열쇠가 된다는 말인가? 그것은 앞에서도 언급한 '연생(緣生)의 법
'이라는 말 속에 설명되어 있다. '연생의 법'이란 조건이 있음으로써
발생한 것이라는 정도의 뜻이어서, 말하자면 실체(實體)로서의 존재성
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인가 있기 때문에 이것 또는 저
것이 존재한다. 그러기에 영원, 불변하는 것이란 인정될 수 없다는것,
그리고 조건에 의해 존재하는 까닭에 그 조건의 소멸은 바로 그 존재의
소멸도 뜻하게 된다는 것, '연생의 법'이란 이런 이치를 가리키는 말이
다.
그렇다면 붓다의 과제가 되었던 고(苦)니 생로 병사니 하는 것은 어
찌 될까? 일체의 존재가 조건에 의해 성립되었다면, 그런 존재의 성질
에 불과한 고나 생로 병사가 영원, 불변한 것이라고는 생각할수 없는
바이다. 그러므로 붓다가 "고는 연생이다."라고 할 때, 그것은 고의 고
유성, 실재성의 부정이라고 보아야 되는 것이겠다. 고도, 생로 병사도
어떤 조건에 의해 생겼다면, 그 조건을 변경시킴으로써 그런것을 극복
할 수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런 뜻이 "고는 연생이다."라는 말씀속
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기에 그 말씀은 인생 문제를 해
결한 붓다의 개가라고도 할 수 있으리라.
이 장(章)의 첫머리에 인용한 글은 이른바 '사제'에 관한 설법의 전
반 부분이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사제설은 바라나시 교외 이시파타나
미가다야(鹿野苑)에서 행해진 첫 설법의 주제였고, 또 붓다의 일생을
통해서 그 사상의 골격을 이루는 것이었다. 이 사제 설법 중에서 먼저
그 전반의 두 절을 떼내어 검토할 때, 거기에는 극히 명쾌한 표현으로
먼저 문제를 제시하고 난 다음 조건이 설명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고(苦)의 성제이다."

붓다는 아마도 미리 네 가지 항목을 세워 놓은 다음 차레차레 그것에
대해 설명을 덧붙인 것으로 생각된다. 그 네 가지 항목이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1) 고의 성제.
2) 고의 발생의 성제.
3) 고의 멸진의 성제.
4) 고의 멸진에 이르는 길의 성제이다.

또는 '제(諦)'라 함은 단언적 명제라는 뜻이므로, 그것은

1) "이는 고다."
2) "이는 고의 발생이다."
3) "이는 고의 멸진이다."
4) "이는 고의 멸진에 이르는 길이다."

라는 형식으로 제기되었던 것인지도 알 수 없다. 사실 그런 표현도 붓
다의 말씀이라 하여 자주 여러 경전 속에 나오고 있다.
어쨌든 붓다는 먼저 문제부터 제시했다. 그것은 원래 붓다가 출가 당
시에 지니고 있던 자신의 과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제는 붓
다 개인의 과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과제임에 틀림없다
. 하기야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과제로 자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 그것은 마땅히 만인의 과제가 되어야 할 성질의 것이겠다. 이 당연한
것, 괴로움으로 자각하고, 인생을 있는 대로의 진상에서 파악한다는 것
은 기실 불교의 기초임에 틀림없으리라. 이것 없이는 불교는 그 첫발
조차도 내 디딜 수 없는 까닭이다. 이 자각이야말로 붓다를 몰아 진리
탐구로 달려가게 한 동기였다면, 그것은 전인류에게도 인생을 대하는
기본 자세이어야 할 것임에 틀림없다고 할 것이다. 그러기에 문제의 제
시가 그대로 진리(성제)일 수 있는 것이겠다.
생(生)도 고, 노(老)도 고, 병도 고, 죽음도 고! 과거의 불교인들은
이것을 합쳐서 사고(四苦)라고 불렀다. 이것만으로는 괴로움을 몇 가지
열거한 것뿐이어서 특별한 뜻이 없어 보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
은 모두가 인간의 유한성을 가리키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불교 용어로 말한다면 그것들은 모두가 '행고(行苦)'에 속한다. 즉 일
체가 무상하여 변화하는 데서 오는 괴로움인 것이다. 이렇게 이해 할
때 비로소 노, 병, 사와 함께 생(生)까지도 고(苦)속에 넣은 뜻이 명료
해 진다.
이런 사고(四苦)에 이어서 열거된 것은 예로부터의 한역으로 말한다
면 원증회고(怨憎會苦)요, 애별리고(愛別離苦)요, 구불득고(求不得苦)
이다. 이런 것들은 사고에 비길 때 좀 다른 범주에 속한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인간의 유한성과 관련된 것도 아니고, 행고 속에 포함될 성질
의 것도 아니다. 구태여 그것들을 규정한다면 우리의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 체험을 세 가지 사항으로 대표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인생은 고 그것이다."라는 말은 인생 전반에 대한 단안이라고 보아
야 한다.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예로부터 불교인들은 사고와 나중에 나온 네
가지 항목을 합쳐서 흔히 '팔고'라고 일컬었으나, 이것은 항목만을 나
열한 데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오히려 붓다가 먼저 인간의 유한성에
대해 말하고, 그 다음으로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 체험을 설함으로써,
결국 이 인생이란 고(苦)가 이니냐는 결론으로 이끌어 간 그 설득의 교
묘함을 잘 맛보는 것이 좋으리라 믿는 바이다.
그 두 번째는 "이것이 고의 발생의 성제이다."라고 되어 있다. 더 단
적으로 말한다면 "이는 고의 발생이다."라는 명제다. 이것에 대해 앞서
지적해 두어야 할 것은 제1명제에서 제2명제로 옮아가는 과정이다. 거
기서는 '무엇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고가 있는 것일까?'라는 설문이 있
어서 그 두 가지 명제를 연결시키고 있다. '연기의 공식'의 전반이 질
문의 형식으로 양자 사이에 개재됨으로써 그 둘을 결합시킨 것이다. 물
론 사제 설법의 말씀에는 그것이 나타나 있지 않으나, 정각 이후에 붓
다가 펼친 논리에는 언제나 이 공식이 자유 자재로 구사되고 있다. 그
리고 이 설문에 대해 "이것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고가 있다."고 대답하
는 것이 이 제2명제인 것이다.
그러면 그런 고(苦)를 있게 하는 조건은 무엇인가? 그것은 갈애라고
대답되어 있다. 갈애(渴愛)라는 말의 원어는 팔리 어로 말한다면 tanha
인데, 그것은 원래 '목마름'의 뜻이어서 목마른 이가 물을 바라 마지않
듯이 사납게 타오르는 욕망의 작용을 가리키는 말이다. 갈애란 그 원어
의 뜻을 살리고자 매우 애쓴 역어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여기서 붓다가 그 말에 부여하고 있는 뜻이다.
그것을 따져 볼 때 이 말은 불교를 이해하는 데 매우 미묘하고 중대한
뜻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점에 대해 우리는 이제까지 좀 소홀하지 않았던가 싶다. 붓다가
욕망에 대해 언급할 경우 매우 조심스럽게 이야기하고 있는 사실을 우
리는 그대로 보아 넘긴 점이 없지 않다고 생각되는 까닭이다. 갈애라는
말의 쓰임새도 그 좋은 보기가 될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붓다는 결
코 욕망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가 부정한 것은 그 지나치게 사
나운 작용이었다. 나는 일찍이 불교가 욕망의 완전한 포기를 요구하는
것이라면 나 같은 것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으리라고 낙담한 일도 있다.
또는 이런 가르침은 완전히 비인간적인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한적도
있다. 그러나 깨닫고 보매 그것은 전적으로 나의 오해임이 밝혀졌다.
이리하여 나는 자신의 불민함을 부끄러워하면서 붓다가 사용한 욕망과
관계되는 술어를 주의 깊게 검토해 갔다. 그 결과로 나는 대략 이런 말
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첫째로 욕망 자체는 '무기(無記)'라고 보는 것이 붓다의 입장이었다
고 이해된다. 무기란 '선악을 구별하기 이전의 상태'라는 뜻이다. 붓다
는 욕망 자체를 일괄해서 그것을 선이라든지 악이라든지 단정한 적은
없던 것이다. 만약 그렇게 단정했다면 그것은 도리어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 되는 까닭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누구나 식욕이라는 욕망을 지니
고 있다. 우리는 그 식욕에 따라 음식을 먹게 된다. 그리하여 적당히
먹어서 몸을 유지한다는 것은 어디로 보나 좋은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
나 지나치게 먹어 도리어 몸을 손상시킨다면 그것은 나쁘다고 할 수 밖
에 없다. 또는 자신의 식욕을 채우기 위하여 남의 것을 뺏아 먹는다고
할 때, 그것 또한 나쁜 행위라고 하여야 될 것이다. 그러기에 욕망 자
체는 무기라고 할 수밖에 없으며, 그 작용에 따라 처음으로 선악의 판
단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소부 경전] '자설경(自設經)' 6:8 에 다음과 같은 구절
이 있던 것이 생각난다.

"고행만이 청정한 행위라는 생각은 하나의 극단이다. 욕망에 아무
나쁜 점도 없다는 생각 역시 하나의 극단이다."

금욕주의의 입장을 취하는 것은 욕망을 악이라고 보기 때문이려니와
붓다는 이 입장을 배격하였다. 고행을 포기한 것이 그 증거이다. 쾌락
주의에 빠지는 것은 욕망을 선이라고 보는 것이겠으나 붓다는 이런 입
장도 취하지 않았다. 출가의 단행이 무엇보다도 뚜렷한 그 증거이다.
이 두 가지 태도로 볼 때, 욕망에 대한 붓다의 견해는 '무기(無記)' 였
다고 아니할 수 없는 바이다.
둘째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욕망을 언급하며 그 지나친 작용을 경계
할 때 붓다는 언제나 신중하게 그 용어를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
면 탐욕이라는 용어가 그것이다. 이것은 원래 raga라는 원어를 번역한
것으로 '붉음(赤)' 또는 '연소'를 뜻하는 말이다. 그것을 붓다는 불꽃
처럼 타오르는 맹렬한 욕망을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한역
에서는 이것을 '탐(貪)'이라는 말로 바꾸어 놓았거니와, 그 원어의 뉘
앙스는 일단 상실된 채로 그래도 아직 욕망의 지나친 상태를 나타내고
있는 점에서는 다름이 없다고 하겠다. 그리고 여기에서 갈애라는 말을
쓰고 있는 것도 또한 이런 배려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붓다는 이런 괴로움을 있게 하는 조건으로 갈애를 지적하고,
그것에 대해 간명한 해설을 베풀어 갔다. 그 해설도 다시 두 부분으로
가를 수 있다. 갈애의 상황을 말한 것과 그 종류를 열거한 부분이 그것
이다.
먼저 그 첫재 부분에 대해서는

"후유(後有)를 일으키고 기쁨과 탐심을 수반하며 이르는 곳마다 그
것에 집착한다."

고 설명했다. 이 중에서 "후유를 일으키고"라는 말은 현대인의 표현으
로는 쉽게 나타내기 어려운 뜻을 내포하고 있다. 후유라는 말은 내생에
서 윤회를 되풀이하는 존재라는 뜻이어서, 결국은 미망(迷妄)의 인생을
반복한다는 정도의 뜻이다. 그리고 그 씨(원인)가 되는 것이 다름 아닌
갈애라는 것이다. 왜냐 하면 기쁨과 탐심을 수반하며 이르는 곳마다 그
것에 집착하기 때문이라고 설명된다. 이것을 한역에서는 "희탐 구행(喜
貪俱行) 수처 환희(수處歡喜)"라고 했다. 그 대상을 가리지도 않고 욕
심을 내어서 그칠 줄을 모르는 상태를 말한 것이라고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둘째 부분은

"그것에는 욕애와 유애와 무유애가 있다."

고 되어 있다. 이것은 갈애의 분류인바, 그 분류의 솜씨는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 그 하나는 성(性)에 관한 욕망(욕애), 둘
째로 지적된 것은 개체 존속의 욕망(유애), 셋째 것은 명예, 권세에 대
한 욕망(무유애)인바, 이 분류 방법은 오늘에서도 근본적으로는 정정할
필요가 없다고 하겠다. 그것은 이를테면 홉즈(1588∼1679)가 인간의 온
갖 욕망을 세심히 검토한 끝에 그것들을 가장 소박한 형태로 환원시켜
서 자기 보존의 욕망, 자기 연장의 욕망, 명예와 권세같이 남의 위에
서고자 하는 욕망 - 그는 그것을 허욕(vanity)이라고 했다. - 의 셋으
로 나눈 것을 생각게 한다.
어쨌든 붓다는 여기에서 괴로움을 생기게 하는 조건을 발견하여 그것
을 상세히 검토하였다. 그러면 그 조건이 되는 갈애를 어떻게 처리 하
겠다는 것인가? 그것이 셋째와 넷째의 성제(聖諦)인 것이다.


아함경이야기 [2. 그 사상. 6. 이는 고(苦)의 멸(滅)이다.]는
다음회에 계속 됩니다.

아함경 이야기13
2. 그 사상. 6. 이는 고(苦)의 멸(滅)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고의 멸진(滅盡)의 성제이다. 마땅히 알라.
이 갈애를 남김 없이 멸하고 버리고 벗어나서, 더 이상 집착함이 없
기에 이르는 일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고의 멸진에 이르는 길의 성제이다. 마땅히 알
라. 성스러운 팔지(八支)의 길이니, 정견, 정사,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이 그것이다."

([相應部經典] 56:11 如來所說. 漢譯同本, [雜阿含經] 15:17 轉法輪)
상응부경전 여래소세 한역동본 잡아함경 전법륜

이것이 사제 후반의 두 가지 성제에 대한 설법이다. 이제 전반의 두
명제와 후반의 두 명제를 따로 나눈 것은 붓다가 그렇게 구분하여 설했
다는 것이 아니라, 그 구조로 볼 때 일단 그런 분류가 가능하기 때문이
다. 앞에 든 '연기의 공식'을 여기에 적용시켜 본다면 "이것이 있음으
로 말미암아 저것이 있다." 또는 "이것이 생김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생
긴다."는 공식의 전반 부분이 쓰이고 있는 것은 사제 전반의 두 명제이
다. 그리고 "이것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없다." 또는 "이것이 멸
함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멸한다."는 후반의 공식이 응용 된 것은 이 후
반 부분인 멸, 도의 두 명제라고 할 수 있다. 또는 그 전반은 고의 발
생에 관한 이론적인 부분, 그 후반은 고의 멸진에 대한 실천적인 부분
이라고도 나눌 수 있겠다.
어쨌든 "이는 고이다."라고 인식하고, 그렇게 만드는 조건을 갈애라
고 단정한 이상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되느냐는 것이 문제가 된다.
그래서 '연기의 공식'의 후반 부분이 응용되어 "무엇을 멸함으로 말미
암아 고를 멸할 수 있는가?" 라고 추궁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대답이 "이 갈애를 남김 없이 멸하여 더 이상 집착함이 없기에 이르는
일" 이라고 되어 있는 것이다. 갈애 때문에 생긴 괴로움이니까 이것을
제거하면 된다는 이론이다.
그것은 참으로 간단 명료한 답변이다. 너무 간단 명료하여 도리어 싱
겁다고 할는지도 모르겠다. 왜냐 하면 인생의 괴로운 양상이란 천차 만
별하고 다기 다양한 것이기에, 도저히 이처럼 간단하게 처리될 수는 없
다고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다기 다양한 것을 쾌
도로 난마를 베듯 풀어 버리는 것이 지혜라고 감히 말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나는 붓다의 정각을 말하면서 뉴턴이 만유 인력을 깨닫던 순간
을 보기로 든 바 있거니와, 그 후 뉴턴에 의해 정리된 인력의 법칙은
간명 했을지는 몰라도 저 밤하늘에서 반짝이는 어떤 멸 하나도 망라하
지 못함이 없었던 것이니, 그것이 과학자의 지혜임에 틀림없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붓다에 의해 정비 된 사제의 명제 또한 간단 명료하면서도
무릇 인생의 모든 양상에 적응해서 어느 하나라도 새어 나가는 것이 없
는 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붓다가 설하신 것을 지헤의 가르침이라고 부
르는 것이다. 다만 인생은 자연과 다르기에 그 법칙에 따라 실천하느냐
안 하느냐는 우리 인간에게 맡겨져 있다. 여기에서 실천의 문제가 중대
한 의의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넷째 명제는 "이것이 고의 멸진에 이르는 길의 성제이다." 라고 되어
있다. 나는 그렇게 번역했지만 더 원어에 가깝게 옮긴다면 "이것이 고
으 멸(滅)에 따르는 길의 성제이다." 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한역에서
흔히 "순고멸도성제(順苦滅道聖諦)" 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고의 멸
(제 3 성제)에 따르는 실천이라는 뜻이다. 어쩌면 그렇게 번역하는 쪽
이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제 3 성제와 제 4 성제는 밀접하게 관
련되어 있어서, 제 3 성제에서 실천의 원리가 수립 되었다면, 제 4 성
제에서는 그 원리에 따르는 실천 항목이 문제가 되고 있다고 할 수 있
겠다. 이 항목이란 물론 '성스러운 팔지(八支)의 길' 즉 팔정도(八正
道)이다.
이미 말했듯이 이 사제는 연기의 원리에 입각해서 그것을 실천의 체
계로까지 재 조직한 것이다. 물론 여기에도 이론이 전개되고 있기는 하
지만 중점은 실천 쪽에 놓여 있어서, 이론도 이런 실천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실천이란 인간의 선택에 매인 문제이
므로 그 길을 가느냐 안 가느냐는 우리의 자유의지에 맡겨져 있다. 자
연 과학의 영역은 필연의 세계이다. 그러나 인간의 영역은 자유의 세계
이기에 이로부터 실천의 무거운 의의가 생겨나는 것이겠다.
붓다가 그 실천 항목으로 열거한 '성스러운 팔지의 길'은 다음과 같
은 여덟 개의 정도(正道)로 이루어져 있다. 정견(正見), 정사(正思),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
정(正定)이 그것들이다. 제 4 성제는 다만 이런 항목들을 열거했을 뿐
이지만, 나는 그것들을 설명하기 위하여 네 묶음으로 분류하고자 한다.

1) 정견 --------------- 바르게 보는 것
2) 정사, 정어, 정업 --- 바른 행위
3) 정명 --------------- 바른 생활
4) 정정진, 정념, 정정 - 바른 수행

이런 분류 방식은 붓다의 말씀에 근거한 것도 아니며, 후세의 불교인
들에 의해 시도된 바도 아니나,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렇게 나누
고 볼 때, 붓다가 지시한 실천이라는 것이 어떤 성질의 것이었는지 잘
나타나는 것 같다.
이것들 중에서 가장 기초적인 것은 제 1 항목의 정견(正見)으로 보인
다. 과거의 불교인들도 이것을 팔정도의 '기체(基體)'라고 불러 이것이
근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견'이란 관찰하고 선택한다는
뜻을 지닌 불교 옹어로서 결국 인간의 오성(悟性)의 작용이라고 하겠으
나, 그것이 실천을 재촉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정견
은 다른 일곱 가지 정도의 기초라고 할 수 있다. 이것으로부터 바른 행
위가 흘러 나오고, 바른 생활 태도가 선택되며, 바른 수행이 선택되는
까닭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이런 여덟 가지 실천이 모두 '정(正)' 이라는
형용사로 불리는 사실이다. 대체 '정'이란 무엇일까? 이 말을 우리는
당연히 알고 있는 것으로 여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바르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조건을 구비하는 것이 "바르다"고 불리는가 하고 따지
면, 정연한 이론으로 대답하기가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알기는 알고
있으나 말하려 드니 말이 잘 안 나온다거나, 답변을 회피해야 될까? 그
러나 이 말은 불교에서 매우 중대한 뜻으로 쓰이고 있는 것이므로 어물
어물 넘길 수는 없는 문제이다. 그리고 이 말에 대해서도 불교 쪽에서
는 정연한 대답을 준비해 놓고 있는 것이다.
'정'의 첫째 조건은 "망령됨을 떠나는 일"이라고 되어 있다. 망령됨
(妄)이란 명석하지 않고 여실(如實)하지 않음을 이름이다. 이것을 '견(
見)'에서 말한다면 허망한 관찰, 허망한 분별이 '망견(妄見)'이다. 또
는 '어(語)'에 관련시켜 말한다면 진실에 어긋나고 명확하지 않은 발언
이 '망어(妄語)'가 된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그런 망령됨이 생겨나는
가? 앞에서도 인용했거니와 붓다는 이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
어 말씀한 적이 있다.

"여기에 물통이 있어서 물이 가득 채워져 있다 하자. 그러나 만약
그 물이 불에 데워져서 부글부글 끓고 있다든지, 또는 이끼나 풀로
덮여 있다든지, 또는 바람이 쳐서 물결이 일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사람은 그 물에 자기 얼굴을 비추어 있는 모습 그대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마음이 탐욕으로 어지러워진다든지, 노여
움으로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다든지, 또는 어리석음이나 의심으로 덮여
있다든지 할 때에는 무엇이거나 여실히 명석하게 관찰하고 판단할 수는
없다는 것이 그 경에서 붓다가 설한 가르침이었다. 이것을 더 추상적으
로 나타내면 객체와 주관 사이에 여러 잡스러운 요소가 개재함으로써
'망령됨'이 생기는 것이어서, 그것을 불교에서는 복(覆;덮는것) 또는
애(碍;장애가 되는 것)라고 일컫는다. 이런 개재물을 남김없이 떨쳐 버
리고 맑은 주관을 가지고 객체를 대하는 것, 그것이 "망령됨을 떠나는
일" 이며, 그 때 일체의 존재는 진상대로 주관에 의해 받아 들여지고,
주관에 의해 선택, 분별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여실 지견(如實知見)이
요, 무애(無碍)의 정견(正見)이다 . 다시 말하면 이것이 언어로 표현될
때 '정어'가 되고, 행동으로 나타날 때 '정업'이 되는 것이다.
'바른 것'의 둘째 조건은 "전도(顚倒)를 떠나는 일"이다. 여기서는
'정견'이 기초가 되므로 그것에 적용시켜 말한다면 "전도의 견(見)이
아닌 것을 정견이라 한다."고 할 수 있다([승만경]).
전도란 관찰과 판단에 임해서 그 순서가 엇바뀌고 진상을 놓치는 일
이다. 대(大)와 소(小)를 거꾸로 아는 것도 그것이요, 미와 추를 잘못
판단하는 것도 그것이다. 또 변화해 마지않는 것을 마치 영원 불변한
듯이 착각하는 것도 그것이다. 붓다는 일찍이 이런 게를 설한일이 있
다.

법에 의해 이익을 얻지 못함과
비법(非法)으로 이익을 얻는 그것은
어느 쪽이 낫다고 하여야 하랴.
법대로 행하여서 얻지 못함은
비법으로 얻음보다 훨씬 나아라.

깨달은 것 적으면서 높은 명성과
깨달은 것 많고도 낮은 명성은
어느 쪽이 낫다고 하여야 하랴.

지혜가 많고도 낮은 명성은
적고도 높음보다 훨씬 나아라.

그것이 바른 일인 줄 뻔히 알면서도, 우리의 일상적인 행위는 자칫하
면 "비법으로 이익을 얻는 일"에 몰두하기 쉽고, "지혜가 적으면서 명
성이 높기"를 바라기 일쑤이다. 그리하여 이런 전도된 사고 방식은 인
생의 모든 영역을 채워 버려서 사람들을 미망과 죄악 속으로 끌고가는
것이다. 이런 것을 '사전도'라고 한다. 이것은 불교의 입장에 서서 인
간이 빠지기 쉬운 잘못을 네 가지로 분류한 것이다.
첫째, 상(常)전도 ----- 이 무상한 존재를 영원한 것인 양 잘못 생각
하는 것.
둘째, 낙(樂)전도 ----- 고(苦)라고 보아야 할 이 인생을 즐거운 것
으로 잘못 생각하는 것.
셋째, 정(淨)전도 ----- 이 부정한 인간 존재를 청정한 것인 듯 잘못
생각하는 것.
넷째, 아(我)전도 ----- 이 무아(無我)인 존재를 자아가 있는 것처럼
잘못 생각하는 것.
그리고 이런 전도가 생기는 이유를 추궁할 때, 결국은 탐욕과 노여움
과 어리석음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기에 이런 장애물을 불식
하여 이 전도에서 떠나지 못한다면, 마침내 '정(正)'에는 이르지 못한
다고 설하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 조건이 되는 것은 "극단을 떠나는 일"이라고 지적된다.
한역 경전의 표현을 따른다면 "가를 떠나 한가운데에 서는 일(離邊處中
;이변처중)"이다. 앞에서 인용한 첫 설법에 "비구들이여, 출가한 사람
은 두 극단을 피해야 하느니라." 고 나와 있던 것이 그것이다. 여기서
'극단'이라고 번역한 것은 팔리 어로 말한다면 anta(끝, 가)인바, 한역
에서는 편(偏) 또는 변(邊), 단(端)이라고 번역되었다. 이 '변'을 떠나
'중(中)'에 서는 곳에 '정'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조건을 가지고 '정(正)'을 규정한다는 것은 다른 데서 그 유례
를 찾을 수 없는 매우 불교적인 사고 방법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아
마도 붓다의 절실한 체험으로부터 이런 조건들이 생겨 났으리라고 생각
된다. 그 체험이란 붓다가 정각을 이루기에 앞서 온 힘을 기울여서 고
행에 매진하던 일을 말한다. 생각건대 극단으로 달린다는 것은 어딘가
인간의 깊은 데에 뿌리박고 있는 경향인 것 같다. 우리의 생각은 자칫
하면 극단으로 달리기 쉽고, 그것을 실천함으로써 자기가 위대해지기나
한 둣이 좋아하는 점이 없지 않다. 이를테면 정치적인 견해만 하더라도
, 좌냐 우냐 확실히 그 입장을 가르려고 드는 것이 우리이다. 그리하여
그 노선을 일단 택하고 나면 그것에 대해 미심쩍은 일이 있든 말든 그
것을 끝까지 밀고 가려 든다. 우리의 처지에 알맞은 융통성 있는 입장
이라는 것은 웬지 기회주의처럼 생각되어 비위에 맞지않는 것일까? 이
렇게 어느 극단으로 달리는 것은 인간의 약함을 숨기려는 행동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붓다조차도 한때는 이런 인간적인 약점에 사로
잡혀 있었다는 것을 붓다의 전기는 우리에게 똑똑히 밝혀 주고 있는 것
이다. 고행에 열중하여 그것으로 길을 타개하려고 했던 사실이 그것이
다. 그러나 붓다는 이윽고 고행에 매달리는 것이 바른 길이 아님을 자
각하여 경연히 그것을 버렸던 것이지만, 그 체험이 이제 여기에 '정(正
)'의 조건으로서 알려진 것은 아니겠는가.
한 경([잡아함경] 9:30:20 억이. 팔리 어 동본, [증지부경전] 6:55
소나)은 이와 관련하여 매우 흥미 있는 문답을 전해 주고 있다.
붓다의 제자 중에 소나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목숨을 걸고 아주
엄한 수행을 계속했건만 아무리 해도 깨달을 수가 없었다. 도리어 망상
만이 일어나서 그를 괴롭혔다. 그것을 아신 붓다는 그를 찾아가서 물으
셨다.

"너는 집에 있을 때, 무슨 일을 잘했느냐?"
"대덕이시여, 거문고를 좀 뜯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면 소나야, 거문고 줄을 아주 팽팽하게 죄면 어떻더냐? 켜기
에 좋더냐?"
"대덕이시여, 너무 팽팽하면 좋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소나야, 아주 허술하게 하면 어떻더냐?"
"대덕이시여, 그리해도 안 되나이다."
"소나야, 네 말대로다. 거문고 줄이 너무 팽팽하거나 너무 허술해
서는 좋은 소리를 내지 못할 것이다. 도(道)의 실천도 그와 같으니
라. 쾌락에 빠지는 일이나 고행을 일삼는 것은 다 바른 태도는 아니
다. 또 지나치게 서둔다면 고요한 심경을 기대할 수 없고, 너무 긴장
을 푼다면 게을러지기 쉽다. 너는 그 중간을 취하도록 하여라."

극단을 떠나 중도(中道)에 설 때 바른 실천이 이루어진다는 것, 이것
이 불교의 실천의 핵심이 되는 이른바 '중도'의 가르침이다.
이리하여 '팔정도'란 이런 여러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는 바르게보는
태도(정견), 바른 행위(정사, 정어, 정업), 바른 생활(정명), 바른 수
행(정정진, 정념, 정정)임을 알게 된다.

아함경이야기 <<2. 그 사상. 7. 나도 밭을 간다.>>는
다음회에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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