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 많은 자의 용기’를 넘어서-/ 김 동 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대한항공 ‘땅콩회항’ 사건의 박창진 사무장은 조현아 부사장 앞에서 폭행당하고 무릎까지 꿇리는 굴욕을 당했지만 
결국 “더 이상 개처럼 살지 않겠다”는 인간 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부친에게 부끄럽지 않으려고 성실하게 살아온” 그는 뜻하지 않게 투사가 되었다. 


  그러나 대다수 피고용자들에게 사용자는 사실 국정원보다 더 무서운 존재다. 
모욕을 참다가 세습 고용주의 비상식적인 폭력에 반기를 든 박 사무장과 같은 행동은 극히 예외이고, 
오늘 이 순간에도 우리시대의 ‘미생’들은 ‘갑’의 횡포 아래에서 그냥 굴욕을 씹으며 살아간다. 
오늘 한국의 기업 조직에서 피고용자는 ‘시민’이라기보다는 노예에 가깝다. 상식이 무너진 세상에서는 상식을 지키는 
일도 엄청난 돌출행동으로 찍혀 돌을 맞고, ‘노예의 덕목’이 칭찬받는 세상에서는 ‘인간 선언’도 고행의 길을 예비한다. 


양심적 제보자가 불법과 거짓의 세상을 바꾸건만 


  그런데도 김기춘 비서실장은 신년 인사에서
 ‘공무원의 기강’을 강조하면서 복종을 소신보다 앞세웠고,
 법원은 조직 비리를 고발했다가 처벌, 해고된 사람들의 소송 사건을 다룰 때, 
“명령에 복종하지 않고 조직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사용자의 주장에 손을 들어 주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국가범죄나 기업비리의 고발자나 사학 비리의 제보자들은 양심과 직업윤리에 따라 행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집단 따돌림, 모욕과 폭언, 해고 조치를 피할 길 없고, 생계곤란과 정신적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희망은 있다. 
황우석 논문조작을 고발한 류영준 연구원, 
청와대의 불법사찰 비리를 고발한 장진수 주무관, 
경찰의 국정원 선거개입 사건 축소수사를 고발한 권은희 경감, 
윤일병 폭행 사건을 제보한 김재량 병장, 
과거사 재심사건에서 무죄구형을 한 임은정 검사, 
국민을 속인 KT를 고발한 KT 직원 이해관 등 
양심의 ‘호루라기’를 분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이 없었다면 공권력과 기업의 불법, 비리, 거대한 거짓의 덩어리는 영원히 땅속에 묻혔을 것이다. 
작고한 아동문학가 권정생은 “혁명가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잘못되고 공정치 못한 일이라면 희생을 해서라도 바로 고쳐나가는 사람이 바로 혁명가다”라고 말했는데, 
이들이야 말로 우리시대의 영웅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이들은 우리를 짓누르는 이 무력감, 권력집단, 언론이 이 퍼트리는 ‘자기완결적인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 
즉 “어차피 바뀌지 않을 거니 가만히 있어라.”라는 악마의 속삭임을 물리쳤다, 
70년대 유신 반대운동에 나섰던 이문영 선생이 〈겁 많은 자의 용기〉에서 강조한 것처럼, 
겁 많은 사람들이 양심이라는 ‘최소주의’ 원칙에 서도 권력을 뒤흔들 수 있다. 
그래서 공익 제보자들의 소신 행동은 애초 그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지금 수많은 의혹을 안고 있은 많은 사건들 중에서도, 
단 한 사람의 양심적 제보자만 나와도 진실이 완전히 공개되어 그것으로 인해 세상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양같이 순한 사람이 투사가 되는 일이 없었으면 


  그런데 겁 많은 소시민과 피고용자들이 이런 용기를 발휘하고 희생을 감수해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국가와 사회, 
조직이야말로 얼마나 한심하고 취약한가? 여전히 우리는 이런 투사, 영웅이 나타나기를 기다려야 하나? 


  물론 호루라기를 불다가 고난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마땅히 칭찬과 그에 따른 사회적 대우가 따라야 하고, 
그들이 생계 곤란을 겪도록 방치해서는 안된다. 그러자면 이들을 지원하는 사회적 기금과 시민단체에 더 많은 후원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들의 고난은 곧 우리의 고난이고 사회의 고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조직 내의 소통, 감시, 내외부의 견제 장치다. 
이 점에서 노조의 공익적인 역할은 특히 중요하다. 
물론 재벌기업의 기업 지배구조도 변해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은 결국 사법정의와 언론의 공정성 여부에 달려 있는데, 
부당한 명령을 거부한 사람이 아니라 그런 명령을 내린 사람이 처벌되어야 하고, 
그것을 조장하고 묵인한 조직이 변해야 한다. 


  을미년 양의 해, 양같이 순하고 성실하게 일만 하던 사람이 투사가 되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질서’와 ‘효율’의 이름으로 구성원의 복종과 충성을 요구하지 말자. 
그들의 인격과 자존심을 존중하여, 진정으로 살맛 나는 조직과 세상을 만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