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書畵 雲谷 姜張遠

 

 
작성일 : 15-02-25 20:05
[詩意圖]정초부 「東湖絶句」- 김홍도 <도강도>
 글쓴이 : 운곡
조회 : 1,254  
 
  • 정초부 「東湖絶句」- 김홍도 <도강도>
 
동호의 봄빛은 쪽빛 보다 푸르러
 
조선시대 후기에 시는 단순히 문학만은 아니었다.
양반뿐만 아니라 중인 계층의 좀 유식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시를 지을 줄 알았다.
이들은 시를 통해서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뽐낸 것만 아니었다.
감정 노출을 자제할 것을 요구하는 유교 사회 속에서 시를 통해 자신의 희노애락을 드러낸 것이다.
더욱이 당파적 이해가 엇갈린 위험스런 정치적 입장은 물론 철학적 생각까지 시를 통해 나타냈다.
 따라서 이 시대의 시는 단순한 시가 아니었다.
이는 시를 짓는 사람들의 존재 가치를 말해주는 수단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인품까지 상징하는 척도가 되기까지 했다.

그래서 생전뿐 아니라 죽어서까지 시인으로서의 명예나 명성을 중시했다.
조선시대 수도 없는 문집이 간행된 것은 이런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집은 살아서만 내는 것은 아니다. 죽은 뒤에 간행하는 일이 성행했다.
정조 시대의 이덕무는 자신이 들었던 이야기라며 한 시인의 문집에 관한 일화를 소개한 적이 있다.
거기에 보면 시인은 평소 가난으로 고통 받으면서도 베갯속에 은자 70냥을 넣어두고
‘이 돈은 훗날 내 문집을 낼 돈이다’라고 주변에 말했다는 것이다.
이덕무는 이를 소개하면서
 ‘차라리 그 돈으로 돼지고기와 좋은 술을 사다 즐기면서 주린 창자를 채우는 게 나았을 것’이라고 혀를 찼다.
이덕무가 혀를 찬 시인은 노비에서 중인으로 올라선 유명 시인 홍세태(洪世泰, 1653-1725)였다.
홍세태는 문학 지형도에서 진시(眞詩) 운동을 주도한 주역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5살 때부터 읽고 쓸 줄 아는 신동이었다.
한 기록을 보면 그는 이씨 집안의 종이었다고 했는데 그의 재능을 알아본 주위의 도움으로 천양되어 시인이자
역관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또 이런재능을 인해 안동 김문의 김창업 김창흡 형제와 어울리게 됐고 이들과 함께
낙송루 시사 아래에서 정선의 막역한 친구인 이병연 등을 지도하기도 했다.
더욱이 그는 김창업의 권유를 받아 중인 시인들의 시집인
『해동유주』를 간행해 자신의 문집이 외에도 이름을 남겼다.

홍세태의 사례에서 보듯이 이 시대는 시가 인격 그 자체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물론 넓게 재능이나 재주가 먼저였겠지만 시를 잘 지으면 종에서 양민으로 면천되는 길도 있었던 것이다.
시가 문학을 넘어 전인격(全人格)을 대변하는 시대에 시는 그림 속으로도 들어오고 있었다.
시의도의 유행은 이런 전국민의 시인화 시대와 궤를 같이 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시대에 시의도 유행을 주도한 화가는 강세화 중심의 문인들과 직업화가 그리고 화원화가들이었다.
앞서 본대로 이 그룹 속의 최북이 당시(唐詩)가 아니라 인구에 회자되고 있던
조선의 시인 이문보의 절구(絶句)를 시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같은 그룹의 김홍도는
홍세태처럼 신분과 무관하게 시인으로 유명해진 인물의 시를 그림 속에 등장시켰다.
 

김홍도 <도강도> 견본담채 29x37.1cm 서울대 박물관

김홍도는 당시 노비출신으로 유명했던 한 시인의 시를 테마로 시의도를 그린 게 전하고 있다.
서울대 박물관 소장의 <도강도(渡江圖)>가 있다.
 김홍도는 그림속 내용을 가급적 화폭 가운데로 몰아넣기를 좋아했다.
보는 이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의도를 가진 구도이다.
이 그림도 강변 언덕을 지나는 거룻배의 모습을 그림 한가운데 모두 배치하고 있다.

양반의 행차인지 거룻배에는 사공 이외에 챙 넓은 갓을 쓴 선비 두 사람이 타고 있다.
그리고 말인지 나귀인지 쉽게 구분은 되지 않지만 고삐를 쥐고 있는 구종배도 한 사람이 타고 있다.
배안의 정경만 봐서는 김홍도의 십팔번인 풍속화의 한 장면이라 해도 나무랄 데가 없는 그림이다.

배 뒤쪽의 강 언덕은 옅은 먹을 칠한 뒤에 준법을 시도해 입체감을 나타냈다.
그리고 앞뒤쪽에도 먹을 옅게 칠한 다음 짙은 먹 선으로 물가에 흩어져 있는 바위를 그렸다.
그런데 이 언덕 왼쪽을 보면 박락이 심해 잘 보이지는 않지만
다리가 긴 흰 새 두어 마리 날아가는 것을 그린 듯한 흔적이 보인다.
흰 새 두어 마리라고 상상이 되는 것은 단원이 위에 적어놓은 시 때문이다. 시의 내용은 이렇다 .
 
高湖春水碧於藍 고호춘수벽어람
白鳥分明見兩三 백조분명견양삼
搖櫓一聲飛去盡 요로일성비거진
夕陽山色滿空潭 석양산색만공담
고호의 봄빛은 쪽빛보다 푸르러
백조 두어 마리 분명히 보이지만
노 젓는 소리에 모두 날아가 버리고
석양의 산색만 빈 못에 가득하네

시는 그리 어려울 것이 없이 평담한 가운데 어느 봄날 물가 풍경을 그림처럼 묘사하고 있다. 
 이 시의 작자는 정초부(鄭樵夫, 1714-1789)이다.
초부는 나무꾼이란 말인데 본명은 정봉(鄭鳳)이라고도 하고 정이재(鄭彛載)라고도 한다.
그는 정조 때 참판을 지내고 양평에 살던 여춘영 (呂春永, 1734-1812) 집안의 노비였다.
그는 여씨 집안에서 43살 되던 해에 노비문서를 불살라 버림으로서 면천되었다.
그 뒤에 양평 월계리에서 나무를 해다 팔면서 생계를 꾸려갔다.
그래서 초부를 자청하고 지냈는데 젊어서부터 시를 잘 지었다.

어려서 그는 양반 자제들이 시를 외는 것을 보고 어깨 너머로 시작을 배웠다고 한다.
천성에 시재가 있었던지 나이 들면서 시로 이름이 나 유명 문사들의 시모임에도 초청될 정도가 됐다.
정초부의 주인 여춘영은 그가 죽었을 때 ‘어렸을 때는 스승이었고 나이 들어서는 친구로 지내며
시에서는 오로지 내 초부뿐이었다네’라는 시를 지어 계급을 떠나 돈독했던 관계를 회상하기도 했다.
정초부는 시로 이름이 나 강세황 그룹의 신광하 역시 양평을 지나가면서 그를 만나보기를 청했을 정도였다.
몇 년전 그가 지은 시집을 국문학자 안대회 교수가 발견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초부유고(樵夫遺稿)』에는 시가 90여수 실려 있다고 전하다.
 (이 시는 윤광심이 지은 『병세집』에는 정씨 성의 노비가 지은 시로 「청심루(淸心樓)」라고 돼있다)

여기를 보면 원시는 ‘고호(高湖)’가 아닌 ‘동호(東湖)’로 돼 있다.
동호는 요즘으로 치면 옥수동 인근이다.
당시 한양의 큰 나무시장이 몇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동대문밖이었다.
그렇다면 정초부는 양평에서 나무를 해 배로 압구정 맞은편의 옥수동 근처까지 가져온 뒤 다시 이고지면서
동대문밖까지 가서 그곳의 나무전 거리에서 팔았던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정초부의 시는 전고를 많이 섞지 않아 평이한 게 특징이다.
시에는 봄날 저녁 무렵의 강가 풍경이 그림처럼 묘사돼있다.

시는 나무를 다 판 뒤에 다시 옥수동 강가에서 해거름에 배를 타고 돌아가는데서 시작된다.
강가는 신록이 돋아나는 풀과 나뭇잎으로 전체가 푸른 빗이다.
그 가운데 강변을 어슬렁 거리던 흰 새 몇 마리가 뱃사공의 ‘어영차 어영차’하는 소리에 푸드득 하고 날아가고 있다.
새들의 인기척에 고개를 따라가보자 거기에는 석양 노을에 비친 산이 한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는 것이다.

시를 이렇게 한번 음미하면 단원 그림의 내용은 바로 이 장면을 포착한 것이라고까지 상상해보게 된다.
뒷모습을 보이는 배 안의 양반은 바로 ‘푸드득’ 하고 날아가는 새와 그림 속에는 보이지 않는
먼 산의 석양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김홍도 <어부도(漁舟圖)> 지본담채 35.9x65.8cm 일본 개인

단원은 이 시가 적지 않게 마음에 들었던지 여러 번 이 시를 테마로 사용한 듯하다.
이는 정초부의 시가 당시 인구에 회자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우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단원을 둘러싼 인맥으로 보면
이런 일반적인 유명세 외에도 또 다른 어떤 인연이 있었던 것 같은 추측도 가능하다.

스승인 강세황의 그룹에는 당시 유명한 노비 시인이 들어있었다.
36살로 요절한 시인 이단전(李亶佃 1755-1790)이다.
그는 연안 박지원의 절친한 친구이자 재상인 유언호 집안의 종이었다.
그는 홍세태나 정초부와 달리 끝내 면천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호를 스스로 필한(疋漢)이라고 했다.
필자는 글자를 뜯어보면 하(下)자와 인(人)로 나뉜다. 그래서 필한이란 말은 ‘하인놈, 하인배’라는 뜻이 된다.
이처럼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자학하면서 시에서 자신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는 주인집과의 인연이 있는 연암의 후배 이덕무를 쫓아다니며 시를 배웠다고 전한다.
그는 시라면 어디고 찾아가 가르침을 청할 정도로 적극적이어서 당대의 마당발로 통했다.
최북을 당시 유명한 소장가였던 남공철에 소개한 사람이 그였다고 한다.
또 중인 시인으로 유명한 조수삼과 어울리며 천수경이 주재하던 송석원 시사에도 핵심적인 인물로 활동했다.
송석원 시사에는 단원도 출입하고 있어 이 시사가 어느 해 즐긴 야회를 그림으로 그린 것도 전한다.

이처럼 표암 서클에 개성적인 노비시인이 활동하는 것을 늘 보았다면
단원이 정초부 역시 범상하게 보지 않고 머리 속에 깊이 새겼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무튼 김홍도는 정초부의 이 동호 절구를 여러 번 그림으로 그린 듯하다.
현재 전하는 또 다른 그림은 부채 그림이다.
그리고 특이하게 나뭇꾼이 아니라 나뭇꾼과 짝이 되는 어부가 등장하고 있다.
옛 그림에서 나뭇꾼과 어부는 같은 부류로서 은자를 상징했다.
엉거주춤하게 뱃전에서 허리를 빼고 그물을 끌어당기는 인물이 그려져 있다.

어부의 머리 위로는 역광으로 비치는 석양 노을 때문에 검은 새가 된 새 세 마리가 날아가고 있다.
그리고 한 쪽에는 원시의 ‘석양산색만공담’이 아니라 ‘서양산색만공당(西陽山色滿空潭)’이라고 적었다.
나뭇꾼을 어부로 바꾼 것은 누구 보아도 의도적인 재해석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하면 동호(東湖)를 고호(高湖)로 바꾼 것이나
석양을 서쪽 노을(西陽)이라 한 것 역시 어떤 의도성이 개입돼있다고 추리해도 무방할 것이다.
단원에게는 이를 가지고 그린 또 다른 그림이 전하는데 이는 한때 사진 영인본까지 나오기도 했다.
그림 내용은 대체로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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