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書畵 雲谷 姜張遠

 

 
작성일 : 15-05-13 18:30
조맹부 「即事二首」其二- 최북 <북창한사도>
 글쓴이 : 운곡
조회 : 617  

조맹부 「即事二首」其二 - 최북 <북창한사도>


옛 먹을 가니 먹 향 책상에 가득하고
 
앞서 소개한 《제가화첩(諸家畵帖)》에 든 최북의 그림은 모두가 시의도이다.
두 점은 이미 소개했고남은 2점 가운데 하나인 <창해관일출(滄海觀日出)>은 제목 그대로 ‘푸른 바다에 일출을 보네’라는
시구가 적혀 있는데 이 시구의 출처가 애매하다.

‘창해관일출’이란 시구는 4만8,900수가 실려 있는 『전당시(全唐詩)』는 물론 중국의 여러 한시 검색사이트에서도 전혀 확인이 안 된다.
비슷한 구절로 삼국지의 조조(曹操)가 창해관에서 일출을 보며 지은 「관창해(觀滄海)」에도 ‘동으로 갈석산에 이르러 너른 바다를 바라
보네(東臨碣石 以觀滄海)’라는 구절이 있지만 닮았을 뿐 같지는 않다. 또 초당시인으로 유명한 송지문(宋之問)의 「영은사(靈隱寺)」에
‘누각에서 너른 바다의 해를 바라보며 문에서 절강의 조수를 대하네(樓觀滄海日 門對浙江潮)’이란 구절이 있기는 하다. 여기도 닮았으되
같지는 않다.

이런 오리무중의 시구는 조선시대 그림 중에 종종 있다. 이에 대해 화가의 자작시라는 설도 있을 수 있지만 이는 근거가 박약하기 짝이
없다는 설이다. 이 화첩만 보더라도 4점 가운데 나머지 3점은 명명백백한 유명 중국 시인의 시를 가지고 그린 시의도이다. 그런데 나머지
한 점만 화가가 자작시를 사용했다고는 도저히 상상하기 힘들다.

또 있다. 최북도 중인 시인이었으므로 자작시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시가 얼마나 유명했는지 몰라도 다섯 자 한 구절만 달랑 적어
넣는 일은 조선시대의 시의도 상식에서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처사이다. 이런 이유 등으로 확인이 되지 않는 시구는 열에 아홉 이상이
화가의 오기(誤記)로 볼 수밖에 없다.

이야기를 여기까지 했으니 이 화첩에 든 나머지 한 점의 시의도도 소개할 의무가 생기게 됐다. 이 그림은 창밖에 오동나무 그늘이 드리운
사랑방에 유건(儒巾)을 쓴 한 선비가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서안(書案)에는 필가와 벼루가 보이고 종이도 한 자락 펼쳐져 있다.
그러고 보면 선비는 붓을 들고 무엇인가 막 써내려 가려는 참인 것처럼도 보인다. 선비 뒤쪽에 열어놓은 벽장에는 책이 수북하게 보인다.
또 방안에는 필통이야 향로가 보여 방 자체도 꽤나 운치 있게 그렸다.
                                                           
                                        

최북 <북창한사도(北窓閑寫圖)> 지본담채 24.2x33.3cm 국립중앙박물관

가만히 보면 먹만 분명치 않지만 종이에 벼루에 붓이 모두 등장하고 있어 문방사우를 염두에 두고 그린 것처럼도 보인다.
그런데 이 그림 한 쪽에 ‘北囱時有凉風至 閒寫黃庭一兩章 毫生館(북창시유량풍지, 한사황정일양장 호생관)’이라고 시구와
관서가 보인다. 창(囱)자는 창(窓)의 고자(古字)이다.
시구 내용은 크게 어렵지 않고 여유롭고 한가한 시간을 보내는 문인 생활의 한 때를 묘사한 것이다. 출전은 원나라 문인화가 조맹부(趙孟頫 1254-1322))의 시 「즉사 이수(卽事二首)」에서 두 번째 시이다.(이 시는 간혹「궤(几)」라는 제목으로 소개되는 경우도 있다) 전체 내용은 다음과 같다.
     
古墨輕磨滿几香 북창경마만궤향
硯池新浴燦生光 연지신욕찬생광
北窓時有凉風至 북창시유량풍지
閑寫黃庭一兩章 한사황정일량장
  
옛 먹을 가니 향기 책상에 가득하고
벼루를 새로 씻으니 찬연히 빛 나네
북쪽 창에 때마침 서늘한 바람 불어오니
한가롭게 황정경이나 한두 장 베껴 볼꺼나
  
조맹부는 송나라 태조의 11대 후손으로 말하자면 황족이다. 송 멸망 이후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가 강남의 현사(賢士)을 20명을 뽑아 올리는데 한 사람으로 발탁돼 원 나라 한림학사가 됐다. 이로서 동족인 한족에게 훼절의 비난 소리를 듣기도 했는데 정치가로서의 공과를
별개로 그는 시 뿐만 아니라 글씨, 그림, 음악에 두루 능한 다재의 문화인이었다. 특히 글씨를 잘 써 따라 쓰려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호인 송설도인(松雪道人)을 따서 그의 스타일을 송설체라 했다. 한국에는 고려 말에 전해진 이래 조선 전기에 이 글씨가 대유행을 했다. 글씨로 유명한 안평대군도 말하자면 송설체의 대가였다. 또 그림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는 남송시대의 궁정 화원에서 유행한 화풍인
원체화풍를 배격했다. 그리고 산수화가 처음 자리를 잡던 당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이른 복고주의 화풍을 제안해 새로이 유행시켰다.
  
이 시는 그와 같은 조송설의 시이지만 언제 지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북경의 관직 생활을 마친 뒤 고향 오흥(吳興)에 돌아온 이후일 것으로만 추측될 뿐이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서재에 앉아 새로 간 먹 향을 맡아가며 도가 수련서로는 최고로 치는 『황정경』을
한가하게 베껴본다는 내용은 문인 풍류로서는 더할 나위없는 경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당연히 이후에 많은 문인들이 앞을 다퉈 암송하던 시구의 하나가 됐음은 말할 것도 없다.
최북이 이 시구를 가지고 멋들어지게 자신이 동경하는 문인 생활의 한 장면을 그렸는데 사실 이는 최북만의 심경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무렵 최북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 시구를 암송하고 있었다.
  
그보다 다섯 살 많은 심사정도 이 시구를 가지고 그린 시의도가 있다. <초당의 선비>라는 제목의 그림으로, 앞서 최북이 그린 서늘한 바람이 때 맞춰 불어오는 북창과는 전혀 무관하게, 물가에 세워진 수각(水閣)이 그 배경이다. 물가에 세워진 수각이라고 해도 정식으로 난간이 둘러쳐져 있다. 그리고 별도의 칸막이라도 해두었는지 한쪽으로 밀어서 묶어놓은 커튼도 보인다. 그 안에 소담한 서탁을 앞에 놓고 한 선비가 앉아있다.
  
자세히 보면 그 역시 붓을 들고 있다. 역시 무엇인가 쓰려던 참이었다. 초각 밖에는 이번에도 오동나무가 두 그루가 큰 키를 자랑하면서 널찍한 그늘을 만들고 있다. 초각 뒤쪽으로는 약간 언덕진 곳에서 개울 소리가 들릴 정도로 물살이 있는 개울물이 흘러들고 있다.
한적한 전원 속에서 여유 있는 생활을 누리는 한 장면으로 어디 흠잡을 데 없는 구성을 갖춘 그림이다. 그 한쪽에 예서 맛이 나는 단정한 글씨로 시 한 편이 적혀 있는데 바로 조맹부 시의 전편이다.(글씨는 현재가 아니라 제3자가 쓴 것으로 여겨진다)
  

심사정 <초당의 선비> 지본담채 28.8x24.8cm 개인
  
그림 속 두 사람 모두 도교 최상급 비서(秘書)인 『황정경』을 베끼려 하는데 한 사람은 아늑한 서재이고 다른 한 사람은 물소리 들리는 수각(水閣) 위에서이다. 이 그림만으로 두 사람의 사이콜로지컬한 멘탈리티를 추측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하지만 같은 시를 놓고도
해석은 화가 나름이라는 것은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시의 암송자는 이 둘만이 아니었다. 최북보다는 33살, 그리고 심사정 보다는 38살이나 적은 김홍도도 이 시를 머릿속에 넣고 있었다. 그는 이를 시의도로 그리지는 않았는데(아직까지 발견된 사례는 없다) 글로 적어 남긴 것은 있다. (세 사람의 관계는 수차 언급한 그대로 강세황 그룹의 선후배 사이이다)
   
단원은 글씨도 일품인데 그의 글씨는 아들 김양기가 『단원 유묵첩』을 만들어 남김으로서 후세에 전하게 됐다. 이 역시 앞서 소개했다. 이 서첩에는 현판 글씨로 보이는 대자서(大字書)에서 시를 베낀 것, 편지글 등 다양하게 들어있다. 여기의 15번째 쪽에 「산거만음(山居漫吟)」이라는 제목으로 시 두수를 적어 놓은 가운데 두 번째 시에 ‘이 구절’이 보인다. ‘산거만음’부터 소개하면 ‘산에 살면서 생각나는 대로 읊조려본다’ 는 정도의 뜻이다. 그런데 이 두 시는 단원이 자작시를 읊조린 것이 아니라 모두 유명한 중국시를 외어서 적어 놓은
것이다.
   
여기에 약간의 문제가 있기도 하다. 두 번째 시에 ‘이 구절’이 보인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는 것은 조맹부의 시 전체를 베껴놓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앞의 1,2구는 조맹부 시가 분명하지만 뒤따라오는 3,4구는 청나라 옹정제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심성수련을 위해 좋은
글귀를 모아 적어놓은 「열심집(悅心集)」에 보이는 구절이다. 김홍도의 뒤죽박죽은 여기에서도 재연되고 있는 것이다. 유묵첩 15쪽에
있는 두 번째 시는 다음과 같다.
  
古墨輕磨滿几香 고묵경마만궤향
硯池新浴照人光 연지신욕조인광
山禽日來非有約 산금일래비유약
野花無種自生香 야화무종자생향
   
옛 먹을 가니 향기 책상에 가득하고
벼루를 새로 씻으니 사람 얼굴을 비치네
산새는 약속하지 않아도 매일 날아오고
들꽃은 씨를 뿌리지 않아도 절로 향기로운 꽃을 피네
  
시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향(香)자가 두 번 중복되면 ‘아차’하게 마련인데 단원은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2번째 구 역시 원시의 ‘찬연히 빛나네(燦生光)’이 아니라 ‘사람 얼굴을 비치네(照人光)’으로 얼버무려져 있다.
베낀 시의 내용이 어떻든 최북, 심사정, 단원 사이에 이 시가 공통으로 암송된 사실만은 변함이 없다. 그렇다고 보면 표암 그룹의 선후배 사이에는 중국발(中國發)의 우아하고 문기 넘치는 문인 생활을 동경하는 연대감으로 끈끈하게 맺어져 있었다고도 생각해보게 된다.

           

                                       김홍도 <송하청송도(松下聽松圖)> 지본담채 29.2x34.7cm 개인
 

그런데 이 유묵첩에 적혀있는 앞쪽시를 보면 조금 더 할 얘기가 생긴다. 우선 그 내용을 보면 이렇다 


文章驚世徒爲累 문장경세도위루

富貴薰天亦謾勞 부귀훈천역만노

何似山窓岑寂夜 하사산창잠적야

焚香黙坐廳松濤 분향묵좌청송도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이 남아도 해가 될 뿐이요

부귀의 지극함도 거짓되고 수고로우니

어찌 산속 조용한 밤에

향 피우고 조용히 앉아 소나무 소리를 듣는 것만 같으리요

이 시는 출전이 없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단원의 자작(自作)이라고도 생각해볼 수 있는데 시의 내용으로 보면 어디선가 본 듯한편안한 느낌이 있다. 그것과는 별개로 단원 그림 중에 과연 이 시를 가지고 그린 시의도가 있다. 큰 소나무에 파초, 대나무, 괴석으로 둘러싸인 집 한 가운데 한 선비가 책상 앞에 앉아있는 그림인 <송하청송도>이다성긴 울바자나 처마 끝에 나무로 차양을 덧댄 것은 단원의 가옥 묘사에 여러 번 되풀이되는 트레이드 마크이다. 어쨌거나 그는 유묵첩에 있는 글을 가지고 시의 한편을 멋지게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 시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조맹부 시구역시 언젠가는 시의도를 그렸을 것이라고 생각해보는 것에 전혀 무리가 없을 것이다. 지금 전하지 않아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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