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書畵 雲谷 姜張遠

 

 
작성일 : 09-05-14 19:34
동양화론의 제설
 글쓴이 : 운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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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화론의 제설 


수묵화[水墨畵] 


 














채색을 하지 않고 먹만을 사용해 그린 그림.

 










강희안, 〈고사관수도〉

채색화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동양회화 고유의 특징이다.

수묵의 역사는 당대(唐代)에 먹의 색이 오채(五彩)를 대신할 수 있다는 사상 아래 채색의 관념을 탈피하면서 시작되었다.

 

백묘법(白描法)에서 출발한 수묵의 사용은 성당기(盛唐期)에 파묵법(破墨法)과 발묵법(潑墨法)이 등장하면서 기법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수묵이라는 말은 당나라 유상(劉商)의 시에 처음 나타났으며, 장언원(張彦遠)의 〈역대명화기 歷代名畵記〉"은중용(殷仲容)은 묵색(墨色)을 사용해 그렸는데, 마치 오채를 겸비한 듯하다"라고 하여 초당기(初唐期)에 이미 수묵이 사용되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당나라 때에는 여전히 사혁(謝赫)이 주장한 육법(六法)의 골법용필(骨法用筆)과 수류부채(隨類賦彩)에 따른 선묘(線描)와 설색(設色)이 중요시되었다.

 



수묵이 보다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8세기 중엽경에 활동한 오도자(吳道子)에 이르러서인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백묘법의 도석인물화를 잘 그린 것으로 유명하지만, 〈역대명화기〉에서 산수는 오도자로부터 일변했다는 기록이 시사하듯 종래의 필선이 강조된 그림과는 다른 방일(放逸)한 기세의 수묵을 사용하여 수묵의 사용 범위를 넓힌 것으로 보인다.

 

그와 같은 시기에 활동한 왕유(王維)는 파묵산수를 시작하여 수묵화 발전에 큰 계기를 마련했다. 이밖에도 노홍(盧鴻)· 정건(鄭虔)· 필굉(畢宏)· 항용(項容)· 장조(張璪) 등도 수묵산수화풍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 인물로 기록에 전해온다.

 

파묵법보다 조금 늦게 나타난 발묵법은 왕묵(王墨)에 의해 비롯되었다. 그는 술을 좋아하여 그림을 그릴 때면 먼저 취하도록 마신 뒤 먹물을 뿌리고[潑], 음악에 맞추어 춤추듯이 붓을 움직이며 상투와 손발을 사용해 그림을 그렸다. 발묵법이야말로 수묵화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기법인데 골법용필이 존중된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화풍이었다.

 

주경현(朱景玄)은 〈당조명화록 唐朝名畵錄〉에서 필선을 배제하고 자유분방한 작화태도를 가능하게 한 발묵법을 창안한 왕묵을 전통적인 신(神)·묘(妙)·능(能)과 구별되는 일품(逸品)에 포함시켰다. 발묵법은 이후 미불(米)·미우인(米友仁) 등의 문인화가들을 중심으로 계속 발전되었고, 남송대에는 목계(牧谿)·양해(梁楷) 같은 선승화가들에 의해 수용되어 감필법(減筆法)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중국 회화사상 수묵화는 산수화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오대(五代)의 형호(荊浩)·관동(關同)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발전을 했으며 이성(李成)·곽희(郭熙)·마원(馬遠)·하규(夏珪)·동원(董源)·거연(巨然) 등의 화풍은 동양화에서 수묵산수 양식의 기초를 마련했다. 수묵화가 가장 중요한 회화표현의 양식으로 자리잡게 된 데에는 소식(蘇軾)·문동(文同) 일파의 문인화론(文人畵論)에 의해 더욱 그 기반이 확고해졌다.

 



수묵화의 전통은 우리나라에도 전해져 조선 전기 이후 대부분의 모든 산수화가 수묵으로 그려졌다. 특히 조선 전기에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이곽파화풍(李郭派畵風)과 남송의 원체화풍(院體畵風)을 토대로 안견(安堅)에 의해 성립된 안견파화풍을 보여주는 작품과 강희안(姜希顔)의 〈고사관수도 高士觀水圖〉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중국의 여러 화풍을 토대로 한국적인 화풍을 형성한 조선 초기의 회화는 일본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의 수묵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조선 중기에는 절파화풍(浙派畵風)이 풍미하면서 수묵의 사용이 더욱 대범해졌으며 묵죽(墨竹)·묵매(墨梅)·묵포도(墨葡萄) 등 사용범위도 확대되었고, 조속(趙涑)·조지운(趙之耘) 부자에 의해 수묵사의(水墨寫意)의 화조화도 그려졌다.

 

조선 후기에는 한국적인 정수를 잘 보여주는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와 풍속화(風俗畵)가 화단을 풍미하는 한편, 남종화(南宗畵)가 본격적으로 유행하면서 수묵화가 절정을 이룬다. 이러한 작품에는 정선(鄭)의 〈인왕제색도 仁王霽色圖〉, 심사정(沈師正)의 〈강산야박도 江山夜泊圖〉 등이 있다.

 

조선 말기에는 김정희(金正喜)를 중심으로 문기(文氣)와 서권기(書卷氣)를 중시하는 남종문인화가 크게 발전하면서 수묵화의 명맥은 근대·현대 화단으로 이어졌다. 또한 이색적인 화풍을 보여주는 홍세섭(洪世燮)의 〈유압도 游鴨圖〉는 파격적인 구도와 수채화적인 기법으로 먹을 사용하여 현대적인 감각을 보여준다.

 

일본에서는 주로 무로마치 시대에 수묵화가 유행했으며 대표적인 화가로는 셋슈 도요[雪舟等楊]와 셋손 슈케이[雪村周種] 등이 있다. 일본 수묵화가들은 묵필을 과감하게 사용하여 주제의 본질적인 특성만 표현하고 나머지를 생략하는 선종적인 기법을 주로 사용했으며, 도쿠가와 시대[德川時代:1603~1867]까지 수묵화가 인기를 누렸지만 점차 형식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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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종화(南宗畵)%3Cbr%3E%3Cbr%3E관련 항목 : 북종화%3Cbr%3E%3Cbr%3E동양화의 한 분파로 북종화(北宗畵)에 대비되는 화파(畵派).%3Cbr%3E%3Cbr%3E[개설]%3Cbr%3E%3Cbr%3E한국에서는 남종화 또는 남종 문인화(南宗文人畵)라는 말로 많이 통용되며, 일본에서는 주로 남화(南怜, 난가)라고 부른다. 이 용어의 시초는 중국 명나라 말의 서화가 겸 이론가로 널리 알려진 동기창(董其昌)과 그의 친구 막시룡(莫是龍)이 1610년경에 쓴 것으로 전해지는 〈화설 怜說〉이라는 짧은 글 속에 정리된 중국 산수화의 남·북종 양파의 구분이다.%3Cbr%3E%3Cbr%3E이들은 당대(唐代) 선불교(禪佛敎)의 남·북 분파가 생긴 것처럼, 중국 산수화도 당대를 기점으로 하여 화가의 신분, 회화의 이념적·양식적 배경을 토대로 하여 같은 구분을 시도하였다. 즉, 남종선(南宗禪)에서 주장하는 돈오(頓悟 : 단번에 깨달음)의 개념, 화가의 영감(靈感), 인간의 내적 진리의 추구를 중요시하는 문인 사대부화(士大夫怜)의 이론을 같은 맥락으로 파악하였다. %3Cbr%3E그리고 점수(漸修 : 차츰 닦아 깨달음)를 주장하는 북종선(北宗禪)과 기법(技法)의 단계적 연마를 중요시하는 화공(畵工)들의 그림에서 상호 유사점을 발견하여, 사대부 또는 문인들의 그림을 남종화로, 화공들의 그림을 북종화로 구분하였다.%3Cbr%3E%3Cbr%3E그러나 남종선의 창시자인 혜능(慧能)과 북종선의 창시자인 신수(神秀)가 각각 광동성 소주(韶州)와 하북성의 형주(荊州)에서 활약한 것과 달리, 남종화와 북종화로 구분되는 화가들의 출신 지역은 반드시 남북으로 구분되지는 않았다.%3Cbr%3E%3Cbr%3E〈화설〉에서 남종화파로 구분한 화가들은 당대 수묵 산수화의 시조로 추앙받게 된 왕유(王維)로부터 시작하여 당나라 말의 장조(張璪), 오대(五代)의 곽충서(郭忠恕)·동원(董源)·거연(巨然)·형호(荊浩)·관동(關仝), 송대(宋代)의 미불(米連)·미우인(米友仁) 부자, 원대(元代)의 사대가(四大家)로 불리는 황공망(黃公望)·오진(吳鎭)·예찬(倪瓚)·왕몽(王蒙) 등이다.%3Cbr%3E%3Cbr%3E동기창의 〈화안 畵眼〉에서는 이 계보에 이성(李成)·범관(范寬)·이공린(李公麟)·왕선(王詵) 등의 북송화가들과 원의 사대가를 이어받은 명대(明代)의 오파(吳派) 화가 심주(沈周)와 문징명(文徵明)이 추가되었다. 그 뒤 심호(沈顥)는 그의 〈화진 畵塵〉에서 절파(浙派) 화가들을 북종화파로 분류함으로써, 남·북종화는 화가의 사회적 지위와 회화 양식을 모두 고려한 구분이 되었다.%3Cbr%3E%3Cbr%3E1781년에 발표된 심종건(沈宗騫)의 〈개주학화편 介舟學怜篇〉에서는 남종화가들과 북종화가들의 출신 지역이 대觀?남쪽과 북쪽으로 구분되는 것을 지적하였다. 그래서 남·북종파의 가름이 화가들의 출신 지역까지 일치하는 것으로 인식하게 하였다. 결과적으로 명나라 말 이후에는 중국 산수화의 양대 산맥이 뚜렷하게 구분 지어졌다.%3Cbr%3E%3Cbr%3E남종화는 위에 열거한 여러 화가들이 구사했던 수묵 산수화(水墨山水畵)의 복합적 양식으로 이해되고 받아들여졌다. 준법(齧法 : 산이나 바위 표면의 질감을 표현하는 필선들)으로는 피마준(披麻齧)·우점준(雨點齧)·미점준(米點齧)·절대준(折帶齧)·태점(苔點) 등이 대표적인 양식적 요소이다. 그밖에도 독특한 용묵법(用墨法), 또는 구도(構圖)의 전형(典型)이 몇 가지씩 조합되면서 소위 남종화의 양식이 차츰 성립되었다.%3Cbr%3E%3Cbr%3E이와 같은 구분은 이미 북송시대부터 차츰 생기기 시작했다고 보아야 한다. 북송시대 소식(蘇軾)과 그의 친구들이, 사인(士人)과 화공의 그림은 그들의 신분적·교양적 차이로 인하여 필연적으로 여러 가지 차이가 난다는 논리를 세웠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사인지화(士人之怜)’ 또는 ‘사대부화(士大夫畵)’라는 용어와 사대부 화론(畵論)을 만들었다.%3Cbr%3E%3Cbr%3E즉 사대부화란 그림을 업으로 삼지 않는 화가들이 여기(餘技) 또는 여흥으로 자신들의 의중을 표현하기 위하여 그린 그림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기법에 얽매이거나 사물의 세부적 묘사에 치중하지 않았다. 단지 그리고자 하는 사물의 진수를 표현할 수 있을 만큼 학문과 교양 그리고 서도(書道)로 연마한 필력(筆力)을 갖춘 상태에서 영감(靈感)을 받아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다.%3Cbr%3E%3Cbr%3E북송대에는 사회적으로 문인(文人), 즉 사대부라는 등식이 성립하였을 때였다. 그러나 원대부터는 반드시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아 결국은 ‘사대부화’ 대신에 ‘문인지화(文人之畵)’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동기창의 남북종화 이론이 성립되었고 이후 남종화와 문인화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생기게 되었다.%3Cbr%3E%3Cbr%3E[우리 나라에서의 남종화]%3Cbr%3E%3Cbr%3E우리 나라에서는 18세기 전반기에 남종 문인화가 본격적으로 수용되고 하나의 양식으로 받아들여진 것으로 파악된다. 하지만 문헌 기록을 통해 이미 고려시대에도 사대부들이 원나라를 통하여 북송시대의 사대부화 이론을 접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작품이 현전하지는 않지만, 문인화에서 산수화 다음으로 중요시한 묵죽(墨竹)과 묵매(墨梅)를 많이 그렸음을 알 수 있다.%3Cbr%3E%3Cbr%3E또한 조선 초기에 현존 작품을 통하여 미가 산수(米家山水 : 미불·미우인 부자의 양식을 답습한 산수화)가 수용된 예를 확인할 수 있다. 남종화의 양식적 요소가 상당히 일찍부터 수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3Cbr%3E%3Cbr%3E남종화가 본격적으로 유입된 조선 후기(약 1700∼1850년)는 한국의 승경(勝景)을 주옥 같은 화폭에 담은 진경산수(眞景山水)와, 주로 서민 계층의 생활을 담은 진솔하고도 해학적인 풍속화가 많이 그려졌던 때였다.%3Cbr%3E%3Cbr%3E이와 같은 한국의 정서와 자아의식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미술 경향 이외에도 이 시기 문화의 다변성에 힘입어 중국 회화의 전통을 반영하는 남종 문인화가 꾸준히 확산되어 갔다. 실제로 진경산수 자체 내에서도 정선(鄭敾) 이후 모든 화가들이 한국의 산수를 묘사함에 있어 어느 특정 경치 묘사에 알맞은 준법을 창안해 내기도 하였다. 하지만 동시에 ‘미가 산수’를 위시한 중국의 남종화의 준법을 적절하게 배합하여 사용한 것을 볼 수 있다.%3Cbr%3E%3Cbr%3E또한 17세기 초기부터 조선에 유입되기 시작한 명·청대 각종 화보(怜譜)의 영향으로 남종화의 전파는 가속되었다. 그중에서 우리 나라에 비교적 이른 시기에 들어온 것은 고병(顧炳)의 ≪고씨역대명공화보 顧氏歷代名公畵譜≫(顧氏畵譜, 1603년), ≪당시화보 唐詩畵譜≫(萬曆年間), ≪십죽재서화보 十竹齋書畵譜≫(1627년), ≪십죽재전보 十竹齋箋譜≫(1644년), 그리고 청나라 초 1679년과 1701년 두 단계에 걸쳐 완간된 ≪개자원화전 芥子園畵傳≫ 등이다.%3Cbr%3E%3Cbr%3E≪고씨역대명공화보≫는 윤두서(尹斗緖)가 생전에 사용하던 것이 남아 있기도 하다. 그리고 정선·심사정(沈師正)·이인상(李麟祥) 등 18세기 화가들의 그림에서는 중국 화보들의 영향이 많이 감지된다. 그러나 ≪고씨역대명공화보≫의 그림 중에는 중국에서 남종화 계열에 들어가지 않는 화가들의 작품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또한 이 화보가 출간되었을 당시에는 아직 남북종화의 분파가 형성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화보는 ‘남종 문인화의 전파’보다는 좀더 넓은 의미의 ‘중국 화법의 전파’에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3Cbr%3E%3Cbr%3E≪당시화보≫가 우리 나라에 들어온 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이 화보에도 1606년(선조 39년) 조선에 왔던 주지번(朱之蕃)의 서문이 있고, 또한 강세황(姜世晃)이 소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고씨역대명공화보≫보다 조금 늦게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당시화보≫ 권5의 〈죽수계정 竹樹谿亭〉의 구도는 윤두서·강세황·심사정·이인상의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다.%3Cbr%3E%3Cbr%3E다음으로 역대 화법을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도록 한다는 목적으로 편찬된 ≪개자원화전≫은 18세기 이후 우리 나라의 산수화·인물화·화조화·영모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 그 영향이 직·간접적으로 나타났다. ≪개자원화전≫에 제시된 점경 인물(點景人物 : 산수화에 나타나는 작은 인물)들의 자세와 수지법(樹枝法)·준법 등이 조선 후기 남종 문인화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3Cbr%3E%3Cbr%3E또한 이 책에 수록된 명가(名家)들의 구도를 약간의 변화만을 주어 모방한 그림들도 많이 그려졌다. 예를 들면, 강세황의 〈벽오청서도 碧梧淸暑圖〉는 화제에 명시되어 있는 것과 같이 이 책에 수록된 명대의 오파 화가 심주의 같은 제목의 그림을 모방한 것이다. ≪개자원화전≫이 편찬된 시기는 이미 남종화가 중국 회화의 정통이라는 인식이 확고하게 자리 잡힌 후였다. 그러므로 이 책에 포함된 화법을 창시한 화가들 중에는 남종화파에 속하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3Cbr%3E%3Cbr%3E우리 나라에서 남종화가 크게 유행한 당시에는 그것을 하나의 화파라는 개념보다는 양식적인 개념에서 이해한 면이 강하였다. 그러므로 도화서(圖畵署)의 화원들이나 사대부 여기 화가(餘技畵家)들이 모두 남종화의 양식을 답습하는 현상을 보였다. 김홍도(金弘道)·이인문(李寅文)·김응원(金應元)·김석신(金碩臣) 등 많은 화원들의 산수화에서 남종화의 준법이나 구도를 빈번히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이 하나의 시대 양식이 될 정도로 널리 성행하였다.%3Cbr%3E%3Cbr%3E19세기에는, 18세기 조선 남종화의 기초 위에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와 그 주변 인물들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남종화의 세계가 전개되었다. 이 시기에도 물론 문인들이 주도적이었다. 또한 새로운 문화 계층으로 성장한 중인(中人) 화가들도 남종화의 성장에 큰 몫을 하였다. 대표적인 문인화가로는 정수영(鄭遂榮)·이방운(李昉運)·신위(申緯)·윤제홍(尹濟弘) 그리고 김정희 일파에 속하는 조희룡(趙熙龍)·전기(田琦)·허련(許鍊) 등을 들 수 있다.%3Cbr%3E%3Cbr%3E18세기 산수화에서 중국의 여러 남종화가들이 양식을 답습하였다면, 19세기에는 주로 황공망·예찬 그리고 ‘미가 산수’로 그 범위가 좁아졌다. 그리고 많은 그림들이 서예성을 강조한 소략한 스케치풍을 보인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김정희의 〈세한도 歲寒圖〉일 것이다. 이 현상은 중국 청대 후기 문인화에서도 볼 수 있어 보다 밀접해진 한·중 화단의 관계를 보여 준다.%3Cbr%3E%3Cbr%3E그러나 한편으로는 화가들의 개성이 더욱 뚜렷이 표현되는 경향을 보였다. 그리고 방작(倣作)의 모델이 중국 회화가 아닌 조선 남종화가의 작품으로 발전하는 양상도 보였다. 이 사실은 조선의 화가를 역사적으로 추앙받아 온 중국 화가와 대등한 위치에 놓게 되었다는 획기적인 변화이므로 그 의의가 크다. 그 좋은 예로 허련의 〈방완당산수도 倣阮堂山水圖〉를 들 수 있다.%3Cbr%3E%3Cbr%3E추사 이후 조선의 남종화는 더 이상의 발전을 보지 못하였다. 단지 조선시대 말기 화원들에 의해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양식으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남종화 본연의 취지나 정신에서 멀어지는 경향을 보였다. 이 시대에는 오히려 묵란(墨蘭)과 묵죽에서 뛰어난 흥선 대원군 이하응(李昰應)과 민영익(閔泳翊)·김규진(金圭鎭) 등의 업적을 들 수 있다.%3Cbr%3E%3Cbr%3E≪참고문헌≫%3Cbr%3E%3Cbr%3E韓國南宗畵의 變遷(安輝濬, 韓國繪畵의 傳統, 文藝出版社, 1988),

朝鮮後期美術의 思想的基盤(姜寬植, 韓國思想史大系 5,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92),

朝鮮時代後期의 南宗文人畵(李成美, 朝鮮時代 선비의 墨香, 고려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 1996),

Chinese Literati on Painting : Su Shih(1037-1101) to Tung Ch'i-ch'ang (1555-1636)(Susan Bush, Harvard Univ. Press,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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