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書畵 雲谷 姜張遠

 

 
작성일 : 04-06-12 21:07
역사속 명사와 시
 글쓴이 : 강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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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명사와 시

우리 역사속의 인물중에 후세에 귀감이 되는 분들의 시와 생애에 대하여 간추려 편집하였습니다. 시 감상과 우리 선조들의 시심을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편집자


高低隨地勢 고저수지세
早晩自天時 조만자천시
人言何足恤 인언하족휼
明月本無私 명월본무사

높고 낮음은 지세에 따르고
아침 저녁은 천시로 부터 비롯한다
사람들의 말대로 구휼함이 어찌 족하겠는가
명월은 본래 무사인것을---.

김인후 [金麟厚 1510∼1560(중종 5∼명종 15)]
조선 중기 문인·서예가.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담재(湛齋). 본관은 울산(蔚山). 성균관에 들어가 이황(李滉)과 함께 학문을 닦고 1540년(중종 35)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에 등용되었으며 이어 박사(博士)·설서(說書)·부수찬(副修撰)을 지냈다. 43년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옥과현령(玉果縣令)으로 나갔다. 명종이 즉위하고, 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난 뒤에 병을 이유로 고향에 돌아가 성리학 연구에 정진하였고, 성경(誠敬)의 실천을 목표로 하였다. 이항(李恒)의 이기일물설(理氣一物說)을 반대하여 이기(理氣)는 혼합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천문·지리·의약·산수·율력(律曆)에도 정통하였고 시문을 잘 지었으며, 글씨는 행(行)·초(草)에 뛰어났다. 저서에 《하서집(河西集)》 《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 《서명사천도(西銘四天圖)》 《백련초해(百聯抄解)》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正)


崖懸蘭亦倒 애현난역도
石阻竹從疎 석조죽종소
高節同夷險 고절동이험
花香郁自如 화향욱자여

조광조 [趙光祖 1482∼1519(성종 13∼중종 14)]
조선 중기 문신·성리학자.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 본관은 한양(漢陽).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으로, 김종직(金宗直)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士林派)의 영수(領袖)이다. 김굉필·정여창(鄭汝昌)·이황(李滉)과 함께 동방 4 현(東方四賢)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1510년(중종 5)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성균관에 들어가 학업에 전념하였다. 15년(중종 10) 학행으로 천거받아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에 초임되었고, 같은 해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전적·감찰·공조좌랑·홍문관부수찬·교리·응교 등을 역임하였다. 정언으로 재직중 박원종(朴元宗)·김안로(金安老) 등 반정(反正) 공신들이 주장한 왕비 신씨(愼氏) 폐출론에 반대하는 한편, 유교를 정치와 교화의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실현을 역설하였다. 17년 경연시독관과 춘추관기주관을 겸임하면서 향촌의 상호부조를 위하여 여씨향약(呂氏鄕約)의 실시를 주창, 8도에 걸쳐 실시하게 하였다. 18년 부제학으로 있을 당시 미신타파를 내세워 소격서(昭格署)의 폐지를 강력하게 주청(奏請)하여,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를 관철시켰다. 이해 11월 대사헌에 승진하고 현량과(賢良科)를 처음 실시하게 하여 김식(金湜) 등 소장학자들을 선발, 요직에 배치하였다. 이들 신진사류들은 훈구세력의 타도와 구제(舊制)의 개혁 및 그에 따른 새로운 질서의 수립에 박차를 가해 나갔다. 19년(중종 14) 정국공신(靖國功臣) 위훈삭제(僞勳削除)를 강력하게 청하다가 훈구파인 남곤(南袞)·홍경주(洪景舟) 등으로부터 강한 반발을 사서 전라도 능주(綾州)로 유배되고, 이어 사사(賜死)되었다. 그의 지치주의적(至治主義的) 도학정신(道學精神)은 후세에 계승되어 이황·이이(李珥) 등 많은 후학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사림의 정신적 표상이 되었으며, 조선유학의 기본적인 성격을 형성하였다. 선조 초에 신원(伸寃)되어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능주의 죽수서원(竹樹書院), 양주(楊州)의 도봉서원(道峰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정암집》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正).


流水桃花在 유수도화재
桑麻雨露多 상마우로다
俗傳無量號 속전무량호
知是武陵訛 지시무릉와

송시열 [宋時烈 1607∼1689(선조 40∼숙종 15)]
조선 중기 문신·학자.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 본관은 은진(恩津). 충청북도 옥천(沃川) 출생. 아명은 성뢰(聖賚). 김장생(金長生)·김집(金集)의 문인으로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고, 1633년(인조 11)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 경릉참봉(敬陵參奉)을 거쳐 35년 봉림대군(鳳林大君;후의 효종)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병자호란 때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잡혀가자 낙향하여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49년 효종의 즉위로 다시 벼슬에 나와 장령(掌令)·세자시강원진선(世子侍講院進善)·집의(執義)를 지내면서 13개 조항의 봉사(封事)를 올렸다. 당시 집권당인 서인(西人) 중 청서파(淸西派)에 속했던 그는 공서파(攻西派)의 김자점(金子點)이 영의정에 오르자 낙향, 송준길(宋浚吉)과 함께 서적편찬 및 후진양성에 몰두하였다. 김자점 몰락 후, 효종의 북벌계획을 도우며 집의·이조판서 등을 지냈는데 효종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북벌계획은 무산되었다. 이 때, 효종의 장례로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제기되자 윤휴등 남인의 3년설을 물리치고 자신의 주장대로 1년설을 관철하여 남인이 실각하였는데, 이것은 후일 정쟁(政爭)의 빌미가 되었다(제 1 차 禮訟論爭). 이후 현종의 신임을 얻어 숭록대부(崇錄大夫)·좌참찬 등을 지냈으나 60년(현종 1) 우찬성에 재직 중 남인의 탄핵을 받고 낙향하였다. 68년 다시 우의정이 되었으나 허적(許積)과의 불화로 사직하였다. 71년 다시 우의정·좌의정을 지냈다. 74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죽음으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재차 논의되자, 예론(禮論)에 따라 대공설(大功說;9개월)을 주장했으나 남인의 기년설(朞年說;1년)이 채택됨과 함께 예(禮)를 그르쳤다는 죄목으로 실각하였다(제 2 차 禮訟論爭). 그 뒤 덕원(德源)·웅천(熊川)·거제(巨濟)·청풍(淸風) 등지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80년(숙종 6)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남인이 실각하면서 귀양에서 풀려나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거쳐 84년 봉조하(奉朝賀)에 올랐다. 그 뒤 제자인 윤증(尹拯)이 윤선거(尹宣擧)의 묘비명을 부탁하였는데 윤휴와의 관계로 인해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고 하여 사제간의 의가 깨졌다. 이로써 노소분당(老少分黨)이 일어났다. 그 후 정계에서 은퇴하여 청주(淸州) 화양동(華陽洞)에 은거하다가 89년 숙종에게 경종의 왕세자 책봉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에 유배되었고, 같은 해 6월 국문(鞫問)을 받기 위해 상경하던 중 남인의 주장으로 정읍(井邑)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 뒤 신원되었다. 그는 주자학의 대가로, 조광조(趙光祖)·이이(李珥)·김장생(金長生)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파(畿湖學派)의 학통을 계승하여 발전시켰다. 이황(李滉)의 이원론적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배격하였고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하였다. 예론에도 밝아 복제(服制)와 중요한 국가전례문제에 깊이 관여하여 2차례의 예송논쟁을 겪기도 하였다. 성격이 독선적이고 강직하여 교우관계가 원만치 못했고 그것이 붕당의 요소가 되기도 했다. 그의 문하에서 권상하(權尙夏)·김창협(金昌協)·이단하(李端夏)·이희조(李喜朝)·정호(鄭澔) 등 많은 인재가 배출되어 조선 후기 기호학파 성리학을 이끌어갔다. 지은책에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分)》 《이정서분류(二程書分類)》 《논맹문의통고(論孟問義通攷)》 《경례의의(經禮疑義)》 《심경석의(心經釋義)》 《찬정소학언해(纂定小學諺解)》 《주문초선(朱文抄選)》 등이 있다. 문묘(文廟)·효종묘(孝宗廟)에 배향되고, 화양(華陽)·매곡(梅谷)·구봉(龜峰)서원 등 전국 70여 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 → 송자대전


迷花歸棹晩 미화귀도만
待月下灘遲 대월하탄지
醉裏猶垂釣 취리유수조
舟移夢不移 주이몽불이

송익필 [宋翼弼 1534∼1599(중종 29∼선조 32)]
조선 중기 학자. 자는 운장(雲長), 호는 구봉(龜峯). 본관은 여산(礪山). 서출(庶出)로서 아우 한필(翰弼)과 함께 일찍부터 문명을 떨쳤고, 명문 자제들과 폭넓게 사귀었다. 초시(初試)를 한 번 본 외에는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에 몰두하여 명성이 높았다. 이이(李珥)·성혼(成渾)과 함께 성리학의 깊은 이치를 논하였고, 특히 예학(禮學)에 밝아 김장생(金長生)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고양(高陽)의 구봉산(龜峯山) 밑에서 크게 문호를 열고 후진들을 양성하였다. 그 문하에서 김장생·김집(金集)·정엽(鄭曄)·서성·정홍명(鄭弘溟) 등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시와 문장에 모두 뛰어났으며 이산해(李山海)·최경창(崔慶昌)·백광훈(白光勳)·최립·이순인(李純仁)·윤탁연(尹卓然)·하응림(河應臨) 등과 함께 선조 때의 8문가로 불리었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구봉집》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


世味澹於水 세미담어수
心源靜似禪 심원정사선
扶節獨出戶 부절독출호
新月照嬋姸 신월조선연

송준길 [宋浚吉 1606∼1672(선조 39∼현종 13)]
조선 후기 문신·학자. 자는 명보(明甫), 호는 동춘당(同春堂). 본관은 은진(恩津). 어려서 이이(李珥)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20세 때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생이 되었다. 1624년(인조 2) 진사가 된 뒤 세마(洗馬)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학업을 닦았다. 서인(西人) 중 청서파(淸西派)였던 그는 49년 효종이 즉위하자 집의(執義)로 기용되어 인조 말부터 권세를 잡고 있던 공서파(功西派) 김자점(金自點)을 탄핵, 파면시키도록 하여 청서파가 집권하도록 하였다. 효종과 함께 북벌계획을 추진하였으나 김자점이 청(淸)나라에 밀고함으로써 좌절되고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 뒤 여러 번 임관되었으나 계속 사퇴하다가 59년 병조판서가 되어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국정에 참여하였다. 효종이 죽고 현종이 즉위,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로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송시열과 함께 남인(南人) 윤휴·윤선도(尹善道) 등의 3년제를 반대하여 기년제를 주장, 논란 끝에 승리하고 우참찬(右參贊)을 거쳐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곧 사퇴하였다. 65년 원자보양(元子輔養)에 대한 건의를 하여 첫번째 보양관이 되었으나 기년제의 잘못을 규탄하는 남인들의 상소로 사퇴하였다. 뒤에 좌참찬 겸 좨주·찬선(贊善)에 이르렀다. 송시열과 학문적 경향이 같았고 이이의 학설을 지지하였다. 문묘(文廟)를 비롯하여 충현서원(忠賢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


身退安愚分 신퇴안우분
學退憂暮境 학퇴우모경
溪上始定居 계상시정거
臨流日有省 임류일유성

이황 [李滉 1501∼1570(연산군 7∼선조 3)]
조선 중기 문신·학자.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퇴도(退陶)·도수. 본관은 진보(眞寶). 경상북도 안동(安東) 출생. 1534년(중종 29) 문과에 급제, 부정자(副正字)·박사·전적·지평 등을 거쳐 세자시강원문학·충청도암행어사 등을 지냈다. 43년 성균관사성을 지내고, 이어 단양군수(丹陽郡守)·풍기군수(豊基郡守)를 지낸 뒤 낙향하였다. 52년(명종 7) 홍문관교리에 임명되었으나 신병을 이유로 사퇴하였다. 그 뒤 30여 차례나 벼슬을 제수받았으나, 대사성·참의·경연참찬관 등을 잠시 지냈을 뿐 대부분 사퇴하고 향리로 돌아가 본격적인 학문연구에 전력하여 활발한 저술활동과 강학(講學)에 힘썼다. 53년 《개정천명도(改訂天命圖)》, 54년 《여노수신논숙흥야매잠주해서(與盧守愼論夙興夜寐箴註解書)》 《사정전대보잠(思政殿大寶箴)》 《연평답문발(延平答問跋)》, 56년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57년 《계몽전의(啓蒙傳義)》, 59년 《답황중거서론백록동규집해(答黃仲擧書論白鹿洞規集解)》 《이산서원기(伊山書院記)》 등을 썼고, 《송계원명이학통록(宋季元明理學通錄)》 편찬에 착수하였으며, 기대승(奇大升)과 사칠논변(四七論辨)을 시작하였다. 그 뒤 61년 《도산기(陶山記)》, 64년 《정암조선생행장(靜庵趙先生行狀)》 《심무체용변(心無體用辨)》, 65년 《경현록개정(景賢錄改定)》, 66년 《회재이선생행장(晦齋李先生行狀)》 《심경후론(心經後論)》, 68년(선조 1)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 《성학십도(聖學十圖)》, 69년 《답노이재의상례서(答盧伊齋議喪禮書)》, 70년 《답기명언서논심성정도(答奇明彦書論心性情圖)》 《답기명언서개치지격물설(答奇明彦書改致知格物說)》 등을 지었다. 1560년(명종 15) 강학 장소를 도산서당(陶山書堂)으로 옮긴 뒤 죽을 때까지 후진교육에 힘썼다. 그의 사상은 정이와 주희(朱熹)의 철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다른 학문을 비판·배척하였다. 성리학에 있어서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입장을 취하면서도 가치적인 면에서 기(氣)보다 이(理)를 중시하는 주리적(主理的) 입장을 나타냈다. 그의 철학적 방법론과 이론은 거경궁리(居敬窮理)와 이기이원론으로 집약되는데, 그는 주희가 주경(主敬)으로 근본을 세우고 궁리를 통해 지식을 쌓았다고 지적하면서 이를 진덕수업(進德修業)의 지침으로 삼았다. 이러한 학문적 태도는 객관적 주지주의(主知主義)정신과 통하는 것이며 그의 이기이원론적 입장은 우주생성관에 근원을 두어, 주돈이의 <태극동이생양정이생음(太極動而生陽靜而生陰)> 이론을 받아들이고, 태극을 이로 파악한 주희의 설에 입각하여 <이동즉기수이생(理動則氣隨而生)>이라 주장하였다. 그 뒤 여기에 체용설(體用說)을 적용하여 이가 작위성이 없다고 한 종래의 이론은 이의 체(體)의 측면이고, 용(用)의 측면에서 말하면 이 역시 작위의 성질을 갖는다고 설명하였다. 또한 격물설(格物說)·심성설(心性說)을 수립하여 <이가 발한다>는 주장을 고수하였으며, 이가 기에 앞서 존재한다는 이우위론적(理優位論的) 사고는 그의 사상 전반에 걸쳐 일관되었다. 사단칠정(四端七情)에 있어서도 기대승과의 논변을 통해 <사단은 이가 발함에 기가 따르는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함에 이가 타는 것(四端理發而氣隨之 七情氣發而理乘之)>이라 하여 이기가 호발(互發)한다고 하였다. 뒤에 퇴계학파·율곡학파(栗谷學派), 주리파·주기파, 영남학파(嶺南學派)·기호학파(畿湖學派)라는 학파가 형성되면서, 그의 문인은 영남의 학풍을 이루었는데, 대표적인 문인으로는 정구(鄭逑)·유성룡(柳成龍)·황준량(黃俊良)·이덕홍(李德弘)·박순(朴淳) 등이 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문묘 및 선조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안동의 도산서원, 의령(宜寧)의 덕곡서원(德谷書院), 예천(醴泉)의 삼강서원(三江書院), 청송(靑松)의 송학서원(松鶴書院) 등 40여 곳의 서원에 주사(主祀)되었다. 시호는 문순(文純).


雲暗江天黑 운암강천흑
風多暮雪深 풍다모설심
遙知衡宇在 요지형우재
歸逕入疎林 귀경입소림

성혼 [成渾 1535∼1598(중종 30∼선조 31)]
조선 중기 성리학자. 자는 호원(浩原), 호는 묵암(默庵)·우계(牛溪). 본관은 창녕(昌寧). 서울 출생. 현감 수침(守琛)의 아들로 1551년(명종 6) 생원·진사의 양장(兩場) 초시에 모두 합격하였지만 복시에 응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해 백인걸(白人傑)의 문하에서 《상서(尙書)》를 배웠다. 54년 같은 고을의 이이(李珥)와 평생지기가 되었으며, 68년(선조 1) 이황(李滉)을 만나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해 경기감사 윤현(尹鉉)의 천거로 전생서참봉(典牲署參奉)에 임명되고, 69년 적성현감(積城縣監) 등에 제수되나 사양하였고, 조헌(趙憲) 등 사방에서 모여든 학도들의 교훈에 힘썼다. 72년 이이와 9차에 걸쳐 서신을 주고 받으면서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을 논하였다. 선조의 속된 관직 제수에 사임의사를 나타내다가 81년 사정전(思政殿)에 등대(登對)하여 학문과 정치 및 민정에 관하여 진달하였으며 왕의 특은(特恩)으로 미곡을 받았다. 83년 이조참판에 특배되었고, 뒤에 동인들이 득세하여 그를 공격하므로 자핵상소(自劾上疏)를 올렸고, 87년에는 자지문(自誌文)을 지었다. 이이가 죽은 뒤에는 서인 가운데 중진 지도자가 되었다. 91년 《율곡집(粟谷集)》을 평정하였다. 죽은 뒤 기축옥사와 관련되어 삭탈관직되었다가, 1633년(인조 11) 복관사제(復官賜祭)되어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81년(숙종 7) 문묘에 배향되었지만 89년 한때 출향(黜享)되었다가 94년 다시 승무되었다. 저서로 《우계집》 《주문지결(朱門旨訣)》 《위학지방(爲學之方)》 등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


採藥忽迷路 채약홀미로
千峰秋葉裏 천봉추엽리
山僧汲水歸 산승급수귀
林末茶烟起 임말차연기

이이 [李珥 1536∼1584(중종 31∼선조 17)]
조선 중기 학자·정치가.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석담(石潭). 본관은 덕수(德水). 강원도 강릉(江陵) 출생. 아버지는 이원수(李元秀), 어머니는 사임당 신씨(師任堂申氏)이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학문을 배웠고 1548년(명종 3) 13세로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51년 어머니가 죽자 파주(坡州) 자운산(紫雲山)에서 시묘한 뒤 54년 성혼(成渾)과 도의(道義)의 교분을 맺고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한 뒤 55년 하산하여 유학(儒學)에 전념하였다. 58년 이황(李滉)을 방문하였고,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으로 장원하였으며, 전후 9번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64년 호조좌랑이 된 뒤 예조좌랑·이조좌랑 등을 거쳐 68년(선조 1)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부교리로 춘추기사관을 겸임하여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69년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지어올리고, 74년 우부승지가 되었으며 재해로 인하여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올렸다. 75년 《성학집요(聖學輯要)》, 77년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지었으며, 80년 《기자실기(箕子實記)》를 편찬하였다. 82년 이조판서가 되어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김시습전(金時習傳)》 《학교모범(學校模範)》을 지었으며, 83년 《시무육조(時務六條)》를 계진하고 십만양병을 주청하였다. 84년 서울 대사동(大寺洞)에서 죽어 자운산 선영하에 안장되었다. 이황과 더불어 조선시대 유학의 쌍벽을 이루는 학자로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연원을 열었다. 정통 성리학적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단순히 성리학만을 고수한 것이 아니라, 불교와 노장철학(老莊哲學)을 비롯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학설과 양명학(陽明學) 등에 대한 이해도 깊었다. 또한 이(理)는 무형무위(無形無爲)한 존재이고, 기(氣)는 유형유위(有形有爲)한 존재로서 이는 기의 주재자이고, 기는 이의 기재(器材)라는 이기론(理氣論)의 입장을 체계화하여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 및 기발이승론(氣發理乘論)을 주장하였다. 또한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에 대하여는 이황의 사단이발설(四端理發說)을 비판하고 사단칠정이 모두 기발이승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철학에만 조예가 깊었던 것이 아니라 정치·경제·교육·국방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과 탁월한 방책을 제시하였다. 동서붕당의 조정을 위한 노력, 보국안민(保國安民)을 위한 양병론(養兵論), 폐법(弊法)의 개혁을 위한 상소, 노예의 속량(贖良)과 서얼들의 통허(通許), 향약(鄕約)·사창(社倉)의 장려, 교육의 쇄신, 경제사(經濟司) 설치의 제안 등은 모두 국리민복을 위한 그의 포부와 국량을 보여주는 것이다. 선조의 묘정(廟庭)과 문묘에 배향되었고, 파주의 자운서원, 강릉의 송담서원(松潭書院), 풍덕(豊德)의 구암서원(龜巖書院), 황주(黃州)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등 전국 20여 개의 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율곡전서(栗谷全書)》가 있다. 시호는 문성(文成).


秋風惟苦吟 추풍유고음
世路少知音 세로소지음
窓外三更雨 창외삼경우
燈前萬里心 등전만리심

최치원 [崔致遠 857∼?(문성왕 19∼?)]
신라 말기 학자·문장가·경주(慶州)최씨 시조. 자는 고운(孤雲)·해운(海雲). 경주최씨 가문에서 신라 말기 <3최(崔)>의 한 사람으로, 6두품 출신 지식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869년(경문왕 9) 12세의 나이로 당(唐)나라에 유학하여 874년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였고, 876년(헌강왕 2) 선주(宣州) 표수현위(漂水縣尉)가 되었다. 879년 황소(黃巢)의 난에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 고변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4년간 표(表)·장(狀)·서계(書啓)·격문(檄文) 등을 직접 지었고, 특히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은 명문으로 이름이 높다. 그 공적으로 879년 승무랑전중시어사내공봉(承務郞殿中侍御史內供奉)에 올라 포장으로 비은어대를 하사받았다. 885년 귀국하여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지서서감사(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事)에 임명되었으나, 진골귀족 중심의 독점적인 신분체계의 한계와 국정의 문란함을 깨닫고 외직(外職)을 원하여 대산군(大山郡)·천령군(天嶺郡)·부성군(富城郡) 등의 태수를 지냈다. 839년 하정사(賀正使)에 임명되었으나 도둑들의 횡행으로 당나라에 가지 못하고, 이듬해 시무책(時務策) 10여 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린 것이 받아들여져 6두품 신분으로서는 최고 관등인 아찬에 올랐다. 그러나 당시 사회적 현실에서는 자신의 개혁안이 실현될 수 없음을 비관, 자신의 정치적 이상과의 사이에서 심각한 갈등을 겪은 뒤, 각지를 유랑하다가 가야산 해인사(海印寺)에서 여생을 마쳤다고 전한다. 그는 유교·불교 이외에 도교·노장사상·풍수지리설 등에도 해박한 지식이 있었다. 특히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은 신라시대 화랑도를 설명해 주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고려 현종 때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고 문창후(文昌侯)에 추시(追諡)되어 문묘에 배향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태인(泰仁)의 무성서원(武成書院), 경주 서악서원(西嶽書院), 함양(咸陽) 백연서원(柏淵書院), 영평(永平) 고운영당(孤雲影堂), 대구 계림사(桂林祠) 등에 제향되었다. 저술로는 《계원필경》 《금체시》 《잡시부》 《중산복궤집》 등의 시문집과, 사서(史書)인 《제왕연대력》, 불교관계의 《부석존자전》 《법장화상전》 《석이장전》 등이 있었으나, 오늘날에는 《계원필경》 《법장화상전》 《사산비명》만이 전한다. 그 밖에 <숭복사비(崇福寺碑)> <진감국사비(眞鑑國師碑)> <지증대사적조탑비(智證大師寂照塔碑)> 등 비문의 글씨가 남아 있다.


春雨細不滴 춘우세부적
夜中微有聲 야중미유성
雪盡南溪漲 설진남계창
多小草芽生 다소초아생

정몽주 [鄭夢周 1337∼1392 (충숙왕 복위 6∼공양왕 4)]
고려 말기 문신·학자.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본관은 영일(迎日). 1360년(공민왕 9)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의 검열(檢閱)·수찬(修撰)을 지냈다. 63년 낭장 겸 합문지후(郎將兼閤門祗侯)·위위시승(衛尉寺丞)을 거쳐 동북면도지휘사의 종사관으로 여진족 토벌에 참가하고 돌아와 전보도감판관(典寶都監判官)·전농시승(典農寺丞)을 지냈다. 67년 예조정랑으로 성균관박사를 겸임하였으며, 태상소경(太常少卿)과 성균관 사예(司藝)·직강(直講)·사성(司成)을 지내고, 72년 중국 명(明)나라에 서장관으로 다녀와 경상도안렴사(慶尙道按廉使)·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 등을 지냈다. 76년(우왕 2) 성균관대사성으로 배명친원(排明親元)의 외교방침을 반대하다가 언양(彦陽)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풀려나 사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왜구의 단속을 요청하고 잡혀간 백성 수백명을 귀국시켰다. 이어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전공사판서·예의사판서·전법사판서·판도사판서를 지냈으며, 80년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이성계(李成桂)를 따라 왜구를 토벌하고 돌아와, 이듬해 밀직부사 상의회의도감사 보문각제학 동지춘추관사 상호군(密直副使商議會議都監事寶文閣提學同知春秋館事上護軍)이 되었다. 84년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라 성절사로 명나라에 가 긴장상태에 있던 대명국교를 회복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 뒤 문하평리(門下評理)를 거쳐 삼사좌사·문하찬성사·예문관대제학 등을 지냈으며, 89년(공양왕 1)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영립(迎立)하였다. 90년 벽상삼한삼중대광 수문하시중 판도평의사사 병조 상서시사 영경령전사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경연사 익양군 충의백(壁上三韓三重大匡守門下侍中判都評議使司兵曹尙瑞寺事領景靈殿事右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經筵事益陽郡忠義伯)에 봉해지고 91년 인물추변도감제조관(人物推辨都監提調官)을 지냈다.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 등이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려 하자, 이들을 제거하고 고려를 끝까지 지키려 했지만 이방원(李芳遠)에 의해 피살되었다. 오부학당·향교를 세워 교육의 진흥을 꾀하는 한편, 《신율(新律)》을 간행하여 법질서의 확립을 기하고, 기울어가는 국운을 바로잡으려 하였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고 시문에 뛰어났다. 개성 숭양서원(崧陽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포은집》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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